항일무장투쟁 정통성 김일성·최현 중 누구에게 있나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의 김일성-최현 관계와 6·25 전쟁 시기의 김일성의 행각 등을 볼 때 북한에서 주장하는 백두혈통의 정통성에는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세습의 정당성으로 북한이 선전하고 있는 백두혈통의 정통성은 항일투쟁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주장과 달리 김일성의 항일 역사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면, 심지어 그 같은 역사가 왜곡 날조된 허위라는 점이 주민들에게 낱낱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까? 가뜩이나 위태롭게 연명하고 있는 정권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처지가 될 것이다.

현재 북한은 쓰러져가는 백두혈통의 신화를 재건하기 위해 절대 충신의 표본으로 최현-최룡해 부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최현이 김일성 시대 수령독재체제의 착근을 위해 한몸을 불살랐던 충성의 화신이었다는 점과 그 아들 최룡해 역시 김정은 시대 충성을 맹세한 ‘대를 이은 충신’의 표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북한 엘리트 및 주민들에게 절대 충성과 복종을 강제하려는 것이다.

최현이 세상을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1950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김일성 정치대학을 나와 북한군 정치장교로 35년을 역임하다 2000년대 초 탈북한 장용철 씨에 따르면, 탈북 당시까지 북한 주민들에게 최현은 존경받는 인사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군 장성들이 새옷을 입지 않으면 몸값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때 최현은 한 평생 평범한 노동자의 모습으로만 살려고 했고, 그렇게 일을 했으니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것이다. 보위부 고위관리로 근무하다 2007년 탈북하여 한국에 들어온 최형철(가명) 씨는 최현을 저돌적이며 원칙주의적인 군인으로 평가한다. 탱크와 같이 밀어붙이는 저돌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목적달성을 위한 과정에 있어 변칙적인 일처리에 대해서는 용납없는 고지식한 군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북한에서 살다가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긴 탈북자들 가운데에는 최현의 이미지를 선친에게 전해 들어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컨대 북한에서 작년에 사망한 이창복 씨는 함북 회령에 소재한 김정숙 교원대학에서 김일성 혁명역사를 가르친 교수였다. 그에게는 딸이 있는데 그녀는 인민군 상사 출신으로 2006년에 탈북하여 2008년 한국에 들어왔다. 이름은 이나영(가명)이며 그녀는 북한에서 아버지에게 들어 최현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 따르면, 빨치산 시절 그들의 우두머리는 김일성이 아니라 최현이었으며 당시에는 최현의 세력이 김일성 일파를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인정이 많았던 ‘호랑이’ 같은 인물로 최현을 회상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최현을 기억하는 나이든 탈북자들이 최현에 관해 지니고 있는 공통된 이미지는 한 마디로 진정한 군인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최현 하면 지도자에 대한 절대 충성과 복종, 자신을 돌보지 않는 희생정신, 그리고 임무가 주어지면 목숨을 걸고 달성하려는 정신력 등을 떠올렸다. 그 같은 최현이었기에 주민들의 충성심 고취의 롤 모델로 부각되고 있는지 모른다. 김정은 체제의 연착륙과 정권안보의 강화를 위해 다시 항일무장투쟁 당시부터 역사화한 백두혈통의 신화를 되살려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두혈통의 순수성을 지켜내려는 북한정권의 고투(苦鬪)는 성공적으로 관철되기 어려워 보인다. 본문에서 살펴봤듯이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은 김일성보다는 최현에게 있었다. 최룡해는 과연 아버지 최현처럼 정권에 대한 절대 충신의 화신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장성택의 처형에서 교훈을 얻어 숙청의 칼날이 자신에게 겨눠지기 전에 모종의 액션을 취할 것인가? 북한 권력투쟁의 역사는 숙청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숙청의 음습한 기운을 최룡해가 감지할 경우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을 상기하며 자신이 살 길을 도모할 것인지, 장성택처럼 무기력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갈 것인지의 여부는 불안정한 북한 정세를 좌우하는 또 하나의 키 포인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