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장벽은 정말 동독관리의 실수로 붕괴되었는가?

베를린장벽은 널리 알려진 대로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공보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의 실수로 붕괴되었다. 샤보프스키가 일일 정기 기자회견에서 그날 당 중앙위원회에서 승인된 여행법 개정안 내용을 설명하다가 “지금부터 누구나 자유여행을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잘못 설명하여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튿날 사태를 되돌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동독지도부가 전면적인 여행자유화를 추인함으로써 1961년 8월 동독 공산정권이 세계적 비난을 무릅쓰고 설치한 베를린장벽은 갑자기 무너지게 되었다. 역사에는 우연성도 많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샤보프스키의 발표 내용


1989년 11월 9일 저녁 6시 55분, 매일 열리는 기자회견이 1시간 동안 지루하게 진행된 말미에 샤보프스키가 여행법 개정안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당 서기장 에곤 크렌츠로부터 기자회견 직전 건네받아 아직 그 내용을 읽어보지도 못한 그는 반은 읽고 반은 대충 해석하면서 “잠정적 여행규칙에 따라 누구나 개인적 여행을 신청할 수 있고 그에 따른 허가는 즉시 내려질 것이며, 각 지방 경찰에게는 영구이주 비자를 신청서 없이도 ‘즉석에서’ 발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발표했다. 그 규정이 언제부터 발효되느냐는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 라고 답변했다.


한 기자가 그것이 서베를린에도 해당되는지 보충질문을 하자 “그렇다. 동독과 서독, 동독과 서베를린의 모든 국경 검문소가 다 해당된다”고 답변했다. 평소 다소 경솔하고 다변인 샤보프스키가 실수를 한 것이다. 추가질문이 이어졌지만 더 이상 답변이 없었고 많은 의문점이 남겨진 채 회견이 끝났다.


베를린장벽의 붕괴


회견 종료 후 기자들은 워낙 의외의 일이어서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공식 발표문이 없어 나름대로 소설을 쓰다시피 기사를 작성하여 보도내용들이 서로 달랐다. 어쨌든 저녁 7시 5분 AP 통신이 제일 먼저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고 보도했고, 서독 공영방송인 ARD의 8시 뉴스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도됐다.


많은 동서독 주민들이 샤보프스키의 회견과 TV 뉴스 보도를 직접 목격했고, 동서독 주민들 사이에는 “모든 여행제한이 풀리고 출국비자도 필요 없게 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동독주민들이 사실여부 확인을 위해 국경초소에 몰려들어 질문을 했지만, 내용을 모르는 그들이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장벽에 몰려든 사람들의 수는 수천, 수만 명 단위로 늘어나 국경개방을 요구했다. 주민들과의 시비 끝에 겁에 질린 국경수비대 경비초소 요원들이 상부의 지침도 받지 못한 채 10시 30분경 국경 바리게이트를 열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를린 지역에서는 동서독 주민들이 함께 장벽에 올라가 장벽을 부수기도 했다.


국경수비대의 보고를 받은 내무장관도 상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국경수비대의 결정을 추인했다. 이렇게 하여 자정경에는 거의 모든 국경통로가 열리게 됐고 베를린은 나팔 불고, 춤추고, 환호하는 파티장 같이 되어버렸다. 이어 3일 동안 동독 군인들이 장벽에 구멍을 뚫어 새로운 국경 출입구를 만들었고 2주 동안 300만 명이 서베를린과 서독을 방문했다. 서독정부는 전에 하던 대로 이들에게 100마르크(6만원 상당)씩의 환영금을 지불했고, 환영금을 받기 위해 더 많은 동독주민들이 서독과 서베를린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3일 동안 서독행 여권 430만 매가 발행됐고 이때부터 동독경찰은 비자발급 용품 키트(kit)를 갖고 다니면서 출국비자를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10일 동안 서방여행을 위한 사증 1,030만 건이 발급됐고 국경지역 50곳에 통행로가 만들어졌다.


동독정부의 의도 및 사후 조치내용


당초 동독정부의 의도는 여행허가 범위를 확대하여 주민불만과 불법탈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것이었지 완전한 여행자유화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서 크렌츠 서기장은 11월 1일 소련방문 시 고르바초프에게 동독인들이 현금을 가지고 가지 않는 한 해외여행을 제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원래 여행법 개정안 작성은 국가보안부(Stasi) 장관이었던 에리히 밀케가 맡았으나 며칠 전 해임됐다. 11월 8일 완성된 초안은 국가보안부와 내무성에서 두 명씩 나온 관리들이 서둘러 작성한 것으로 “개인적인 해외여행 신청은 지금부터 특별한 전제조건 없이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 규정은 여권과 비자 발급절차를 대폭 간소화한 것일 뿐 출국비자 없이 해외여행을 허락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동독에서는 여권을 받아도 별도의 출국비자를 받아야 해외여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비자발급 과정에서 여행자유화의 속도를 조절할 생각이었다. 더욱이 새 여행법이 베를린장벽에도 적용된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베를린장벽은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관리 하에 있었기 때문에 동독정부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다. 11월 9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는 그 초안을 승인했고 12월 중순 개최될 당 특별회의 준비에 골몰해 있던 크렌츠는 자신의 업적 홍보를 위해 이를 샤보프스키에게 준 것이다. 당시 동독정부의 계획은 여행법의 시행세칙을 만들어 먼저 각 국경초소까지 하달한 다음 새로운 여행법을 공식 발표한다는 것이었고,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크렌츠가 11월 1일 고르바초프 면담 시 새로운 여행법을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시행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국경개방은 당초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나 크렌츠는 장벽개방이 동독정부의 사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사태를 되돌리기 어렵다고 판단된 데다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혁가로서의 자신의 인기하락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1월 10일 아침 크렌츠는 소련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고 코체마소프 대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스럽다면서 크렌츠를 질책했다. 크렌츠는 국경개방이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을 소련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항변했다. 코체마소프는 “그러나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하면서, 더구나 “개방한다고 한 것은 동서독 간의 국경이지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문제인 베를린 장벽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크렌츠는 머뭇거리다가 “그건 이제 원론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동독도 소련도 사태를 수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서독 지도자들이 앞다투어 장벽 현장에 몰려들었던 것과는 달리 며칠이 지나도록 현장에 나와 본 동독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동독정부의 실수는 동독 공산정권의 무능을 백일하에 드러내게 되었고, 그 후부터 사태의 주도권은 시위 군중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장벽 개방의 배경


베를린장벽 개방은 직접적으로는 공보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의 개인적인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동독 공산지도부 내부에 있었다.


첫째, 동독지도부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크렌츠가 서기장에 취임한 후 3주밖에 되지 않았고 바로 이틀 전 슈토프 내각이 사퇴했으며, 바로 전날 당 중앙위원회마저 대폭 개편되어 책임 있게 국정을 이끌어갈 경험 있는 지도부가 형성되지 못했다. 실수를 한 샤보프스키는 모드로우 총리와 함께 개혁파로 알려진 인물로 이틀 전에 공보담당 정치국원에 임명되어 경험이 없는 데다 여행법을 심의한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그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둘째, 동독지도부가 사태를 안이하게 판단했다는 점이다. 동독지도부 가운데 장벽개방이 동독 종말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샤보프스키는 동독정부가 인기 있는 정책을 취해 동독주민들이 정부를 믿게 되었으니 곧 안정화 과정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셋째, 주민불만 해소방법은 여행자유화 밖에 없다고 생각한 크렌츠는 국경개방의 취소로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대중 지명도가 낮아 ‘새로운 옛사람’이라는 평을 듣던 크렌츠는 대중들에게 개혁가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고, 샤보프스키에게 여행법 개정안을 주면서 “이것은 히트 칠거요” 라고 얘기까지 했는데 자신의 이미지를 구기고 싶지 않았다.


넷째, 크렌츠는 사태를 되돌릴 수 없는 이상 국경개방을 이용해 위기에서 탈출하고자 했다. 국경개방으로 자신의 인기가 올라갈 수 있고, 국경개방의 대가로 서독으로부터 수십억 마르크의 재정지원을 얻어내 상황을 안정시켜 보자는 희망도 있었다. 또 서독 사민당의 주장대로 서독측이 스스로 동독 이주자의 수용을 제한할 가능성도 있다고 기대했다. 그래서 장벽개방이 자신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모든 기대는 빗나갔고 장벽붕괴 후 동독 공산정권은 주민들의 요구에 끌려가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