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거주 中화교들의 황금기와 쇠락기

북한의 공식 국가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실상은 완전히 반대다. 북한은 출신 성분에 따라 주민들을 5계층(특수, 핵심, 기본, 동요, 적대)으로 나누고 있다. 또한 북한 주민은 국가의 허락 없이 출국을 하지 못하고, 일반적으로 출세를 하려면 조선노동당에 입당해야 한다.

이런 사회 상황에서도 특색적인 집단이 있다.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출신 성분도 없고 입당도 불가하며 군인도 될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합법적으로 마음대로 중국에 드나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람들은 중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는 북한 주민, 바로 화교(華僑)다.

중국인들은 한반도에 오래전부터 거주했다. 현재 북한의 화교 대부분은 일제시대 중국이나 만주국에서 온 이민자의 자손들이다. 1945년 광복 당시 한반도엔 수만의 중국인이 거주했고, 이 중 74% 정도가 38선 이북에, 바로 북한 지역에 거주했다.

일본의 항복 이후 소련 군정은 북측에서 공민증 제도를 실시하면서 주민을 ‘평양주민’ ‘지방주민’ ‘외국인’으로 분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화교는 ‘외국인’으로서 공민증을 부여받았다. 화교들은 이렇게 북한 영주권을 가지게 된 셈이다. 하지만 화교의 국적 상태는 복잡하다. 1949년까지 소련은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했었지만, 한반도 북방에서 거주했던 화교들은 당시 만주를 다스렸던 중국공산당 동북국(東北局)이 관리를 맡기도 하였다. 이후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였고, 화교들은 자동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이 되었다.

1950년대 말기까지 화교들은 북한에서 어느 정도의 특권과 자치권까지 있었던 집단이었다. 북한 화교 대표 조직인 ‘조선화교연합회’는 당시 중국 당국의 지도를 받았다. 화교를 위한 학교도 북한 당국으로부터 독립됐었고, 학교는 중국인 교사, 중국 교육과정, 중문판 교과서를 바탕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북한 정부는 화교들에게 물질적인 지원까지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 공격을 받아 파괴된 화교 가정집을 무료로 재건해 주는 식이었다.

1958년 북한과 중국은 한국전쟁 시절부터 북한 땅에 주둔한 중국 군대 철수를 합의하였다. 이 협정 때문에 김일성은 그때부터 중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960년 북한 당국은 화교를 대상으로 중국 국적을 포기와 북한 귀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963년 북한 당국은 화교학교에 대한 개혁을 실행, 교육언어를 조선어로 바꾸고 교육과정도 북한학교와 동화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 화교 암흑기의 시발점에 불과했다.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선언할 당시 북중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수많은 화교들은 스스로를 ‘적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북한 당국은 화교에게 북한 귀화, 중국 귀국에 대한 선택을 강요했다. 귀화, 귀국 둘 다 결국 화교 신분을 버리는 뜻이었는데, 화교 중 이런 북한 당국의 정책을 반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 힘은 미약했다.

화교와 북한 당국의 다툼 중 대표적인 사건은 1966년 일어났던 ‘평양 중국인 중학교 사건’이었다. 당시 평양 중국인 중학교 학생들은 모임에서 혁명과정에서 청년의 역할을 강조하는 마오쩌둥의 연설을 라디오 통해 듣는 등 열성적이었다. 그런 와중 학교 당국에 마오쩌둥 사상을 교육과정에 포함시켜야 된다는 요구도 했는데, 북한 당국은 이런 요구를 당연히(?) 거부하였다. 이후 학교는 폐쇄됐다.

1971년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북한 방문을 시작으로 북중 관계가 완화되었고, 북한은 화교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을 중단시켰다. 또한 1960년대에 중국 국적에서 제적된 화교들에게 국적 회복을 사실상 허가하였다. 중국 국적 회복을 희망한 사람들은 중국 대사관으로부터 중국 국민 신분증을 받을 수 있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鄧小平)은 ‘개방·개혁’ 정책을 실행하였다. 이로 중국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되고 마오쩌둥 시대보다 훨씬 자유스러운 국가가 되었다. 이런 신(新)중국은 북한에 거주하는 화교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갖게 했다. 뿐만 아니라, 1979년부터 중국 당국은 화교의 귀국 지원 조치를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당시 수많은 화교들이 중국으로 귀국하였다.

1990년 이후 중국과 북한의 생활 수준 차이가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중국 경제는 가파른 성장 속도를 보였지만 북한은 경제 위기와 기근 시대가 도래하였다. 북한 주민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투쟁에 중국 상품들은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런 이유로 바로 이 시절은 북한 화교의 황금기가 되었다.

화교는 언제든지 중국을 방문하고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 외에 이 같은 특권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북한 시장에서 중국의 상품 수요가 높아지면서 대다수의 화교는 비법(非法)성 경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화교의 생활 수준은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함경북도 회령, 평안북도 신의주 등 접경 지역 같은 경우 살림집을 3채 보유한 화교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런 지역에서는 TV를 비롯한 고가의 전자제품과 화려한 생활을 영유하는 화교들의 생활은 이미 일상화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젊은 화교 중 부모를 따라 상인이나 사업가가 되는 것보다 중국에 살고 싶은 사람이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요즘에는 중국으로 귀국하는 화교도 많아지고 있다. 2009년 당시 중국 측은 북한에 화교가 5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고 발표했는데, 지금은 그 수가 더 줄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난해 12월 북중 경제협력을 담당했던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 처형된 이후 북중 관계가 예전같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또한 화교들이 내부 정보를 빼간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김일성 시대와는 다른 정치적 이유로 화교들이 재차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하다. 과거 경제적인 이유로 선망의 대상이 됐던 화교들의 존재가 정치적인 문제로 쇠락하는 모습을 보는 게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