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공산정권이 총 한방 못 쏘아보고 멸망한 이유는?

동독 공산정권이 17만 명의 정규군과 막강한 국가보안부(Stasi)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총 한방 못 쏘아보고 멸망한 이유로는 다양한 요인들이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①주민탈출 및 시위사태가 예상외로 급진전 되어 대응이 어려웠고, ②공산 지도부가 안이한 판단을 했고, ③공산정권에 대한 불만팽배로 무력진압 명령의 실행여부에 확신이 없었으며, ④공산 지도부의 체제수호 의지가 부족한 데다, ⑤소련이 유혈진압에 반대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상세한 내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태 급진전에 따른 대응 실패


동독혁명 과정에서 모든 사태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급진전되어 사전대비가 없었던 공산정권은 사태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수명 단위로 이루어지던 주민탈출이 1989년 6월 이후 매일 2,000명 규모로 늘어났고, 9월 초 라이프치히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된 촛불시위가 두 달 만인 11월 4일 베를린 시위에 100만 명이 참가하는 등 급속히 확대되어 시위대처 경험이 없던 동독 보안기구들로서는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공산지도부의 안이한 판단


1989년 7월까지만 해도 동독주민들의 개혁요구는 매우 미약했다. 가끔 소규모 시위가 산발적으로 있었으나 요구사항도 여행자유의 확대, 평화, 인권, 환경보호 등 체제개혁 요구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더욱이 호네커 정권은 소련과의 긴밀한 유대유지, 국제적 지위향상 등 그간의 대외 정치적 성공에 도취되어 대내적 위기징후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1989년 7월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이 시작되었을 때 동독 지도부는 서독행을 원하는 사람들의 출국을 허가하면 탈출사태 진정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10월 7일 동독 공산정권 수립 4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시위가 대규모화된 뒤에는 19년간 통치한 호네커 서기장을 물러나게 한 후 여행자유를 확대하고 서독의 지원을 받아 경제상태를 개선하면 주민불만을 무마할 수 있을 것으로 안이하게 생각했다. 더욱이 소련이 동독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버티고 있는 한 동독이 멸망하거나 서독에 흡수될 가능성은 없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무력진압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확신 부재


1988년 이후 헝가리,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등 동유럽 공산국가에서 공산당 독재 폐지, 개혁세력 집권 등 격심한 변혁을 겪었으나 동독에서의 개혁요구는 미약했다. 동독 국가보안부(Stasi)를 중심으로 철저한 사회감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데다 동독 주둔 소련군이 최후의 버팀목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동독주민들 간에 공산 독재정권에 대한 염증이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당과 정부의 간부급과 그 가족들마저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무력진압의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발포명령이 내려지면 의무병들인 병사들이 군 지휘관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 지도부가 섣불리 발포명령을 내리기 어려웠다.


공산 지도부의 체제수호 의지부족


위기를 맞이한 동독 공산정권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유혈진압 뿐이었고, 호네커 정권은 10월 초 시위가 확산되자 유혈진압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시위대에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병사는 출동부대에서 제외했고 사상자 발생에 대비한 수송계획, 혈액, 시체 담을 자루까지 준비했다. 특히 동독 평화혁명의 중심지인 라이프치히 주둔군 부대에는 고도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필요한 경우 발포해도 좋다는 「인민군 명령 89-105」가 하달되고 실탄도 지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10월 7일과 8일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구타와 대규모 검거가 있었을 뿐 끝내 발포명령은 내려지지 않았고, 독자적 판단으로 발포명령을 내린 지휘관도 없었다. 그리고 10월 8일 밤늦게 보안담당 정치국원 에곤 크렌츠가 라이프치히로 달려가 발포명령을 취소했다. 동독 지도부에는 어떻게 해서든 동독 공산정권을 수호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진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77세의 노쇠한 독재자 호네커는 8월 21일 간암 수술을 받느라 3개월간 거의 집무를 보지 못한 채 심신이 몹시 지쳐 있었다. 정치국원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보안담당 정치국원 크렌츠, 국가보안부 장관 밀케, 국방장관 호프만은 2년 전부터 호네커 제거음모에 열중하고 있었고 모든 책임을 호네커에게 지우면 사태수습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동독 정치국원들은 자기들이 목숨을 걸고 발포명령을 내리기보다는 루마니아식 해결방법, 즉 미움받는 지도자를 제거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소련으로부터 호네커 제거문제에 대한 승인을 받아놓고 있었다. 독재정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믿는 한 목숨을 걸고 발포명령을 내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지방의 보안기관들은 사기를 잃은 중앙기관으로부터 명확한 행동지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량살상으로 이어질 무력진압을 시도할 수 없었다.


소련의 유혈진압 반대


동독 공산정권이 유혈진압을 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소련의 반대 때문이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공산정권 수립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은 전날 밤 있은 동독 정치국원들과의 비밀회합에서 “동독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는 모스크바에서 결정될 일이 아니라 베를린에서 결정될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동독주둔 소련군은 동독주민들의 시위와 관련해서는 병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 소련지도부는 동독주재 코체마소프 대사를 통해 동독주민들의 시위를 무력진압 해서는 안 된다는 의사를 동독지도부에 전달했다. 이제 동독주둔 소련군은 동독의 버팀목이 아니라 동독의 무력동원을 억제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