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중국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국빈 방한으로 한국과 중국이 더욱 가까워진 분위기다. 시 주석은 박근혜 대통령을 ‘오랜 친구(老朋友·라오펑여우)’라고 부르고 서울대 특강에선 26차례 박수를 받은 데다, 그의 부인 펑리위안 (彭麗媛)은 화려한 미모에 친근한 제스처로 우호적 느낌을 한껏 과시했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북한 보다 먼저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었다며 언론은 환영했다. 이제는중국이 한국을 더 중시하는 의미라는 해석도 나왔다. 과연 그럴까? 불과 60년 전 압록강에서 38선까지 밀려 왔던 전쟁의 기억은 금새 치유되는가? 동북아를 지배했던 5천 년 ‘중화(中華)’의 역사는 사라졌을까? 과연 대한민국은 중국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북·일이 접근하고 한·중이 가까워진 배경에는 동북아 정세의 독립변수로 자리 잡은 미국과 핵을 가진 북한이 있다. 이 둘을 둘러싼 경제, 군사안보 차원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오늘날 시진핑 방한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잉태했다. 아시아로 돌아선 미국(Pivot to Asia, Rebalancing toward Asia)을 용납할 수 없는 중국, 미국을 등에 업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안보 대리인을 자임하는 일본, 한반도에서는 유럽에서의 반만큼도 영향력이 없는 러시아, 일본을 끌어당길 강력한 유인책(납치자 문제 해결)을 갖고 있는 북한, 그 사이 끼인 한국. 이것이 동북아의 맨 얼굴이다. 중국은 타개책으로 한국을 선택했다. 왜 일까?

당연하다. 동북아 안보질서에서 서방세계에 비친 중국의 전략적 가치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라 일컬어지는, 서방국가로서는 전무했던 대북 영향력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이었다. 중국 입장에서 북한은 미국의 입김을 제어하는 전략적 완충지이다. 그러나 북한의 일관된 군사 핵 추구 정책에 대해서만큼은 중국의 영향력이 기대만큼 크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중국으로선 아픈 속내인 셈이다. 이 틈을 일본이 비집고 들어왔다. 평화헌법의 사실상 개정으로 집단적 자위권을 천명하더니 북일 수교에 다시금 다가섰다. 때를 놓칠세라 북한은 과감하게 일본의 손을 잡아준 터였다. 미국은 태평양 바깥에서 관망하고 있다. 미국에게 개입의 명분과 시점이 현재로서는 애매하다. 경제적 상호의존과 군사안보 갈등이 비례한 이 지역만의 특이한 ‘동북아 패러독스’가 지배하고 있는 동아시아 정세에 미국이 당장 그물을 던질 이유는 없다.

이미 한-중-일 세 나라가 만들어내는 지역 경제력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2%를 차지하고 있다(2012년 기준).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 협정(TPP)으로, 중국은 동아시아지역 포괄적 동반자협정(RCEP)을 서두르는 상황이다. 이 둘은 사실상 상호 배타적이다. 동아시아 권역국가들의 선택을 압박하고 있다. 과거 중국의 동아시아 지배원리는 ‘사대(事大)관계’로의 속박이었다. 현대식으로 말한다면 정례적 조공을 통해 ‘을’의 상대적이고 일정한 자율성을 보장한 갑·을의 정립. 동양식 ‘소프트 파워’였지만 대등한 친구는 결코 아니었다. 설령 문화적으로 ‘을’의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수평적 친구관계는 아닌 것이다.

한국의 고대, 중세사는 중국에게 고려, 조선이 결코 한 번도 ‘갑’인 적이 없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긴 역사를 떨치고 2014년 하루아침에 지도자의 개인적 친분에 의해 국가급(級)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왕가(王家)의 친분은 삼국시대에도, 고려,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100여 년 전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에서 조선을 두고 맞붙었다. 이른바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 파죽지세로 청나라를 완파시키는 일본의 팽창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영국과 러시아가 중재에 나섰으나 일본은 모두 거절하고 미국의 제안을 택했다. 미국이 중립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895년 미·일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은 일본이 당시 제국주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승부수였다.

중국이 이 아픈 과거를 잊을 리 없다. 자본의 국가독점을 고수하는 중국이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아시아로부터 아프리카를 잇는 해상거점을 진주목걸이 형태로 완성해 가는 마당에, 미·중 간 패권경쟁에서 순순히 타협할 리 만무하다. 현대 중국이 과거 대륙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스스로 해양국가라고 자처하고 나선 것이 빈 말은 아닌 것이다. 중국의 해상선 ‘진주목걸이’에 대항한 미국의 타개책은 호주-인도-필리핀-일본을 삼각형으로 묶어 중국의 ‘바닷길’을 깨는 전략이다. 중간에 놓인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는 그야말로 중첩적이다. 어느 한 편에만 설 것인가 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전략은 양자택일의 선택 자체가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계속해서 유효한 카드임을 유지하는 지혜로움이겠다.

남·북이 충돌할 때 중국이 남한 편을 들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하는 사람도 있을까? 1961년 김일성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서명한 ‘북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은 그 의미가 퇴색한 것 아니냐는 일각의 관측에도 불구하고 시효는 변함없다(7조: 조약 내용의 수정이나 종결은 쌍방의 합의에 따른다). 더욱이 자동개입 조항(2조: 어느 한쪽이 침략을 받으면 다른 한쪽은 지체 없이 군사원조를 제공한다)마저 명시돼 있는 마당이다. 상호 희생이 없는 허울뿐인 친구는 어려울 때 신뢰할 수 없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미워도, 여전히 북한의 혈맹이지 남한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돈(경제)’으로 쌓은 우정으로는 ‘피(안보)’로 맺은 관계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북·대남 정책이 제각기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중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대한반도 정책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시 주석의 방문도 예외는 아니다. 역사를 통해 굳어져 온 이해관계야말로 ‘경로의존적’일 터. 남한은 한 번도 중국의 친구였던 시절이 없었다. 중국이 북한에 이만큼 매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중공군 37만 명의 피가 바탕이 됐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국에게 한국전쟁은 한국과의 전쟁이 아니라 당대 유일의 최강이었던 미국과의 한 판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름조차 ‘항미원조(抗米援朝) 전쟁’ 아닌가.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30년 간 중국의 대외정책은 숨어서 힘을 키운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긴 절치부심의 세월을 거치고 후진타오(胡錦濤)에 이르러서야 ‘필요하면 개입하겠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로 나아갔다. 중국 5세대 지도자라는 시진핑은 외교정책의 레드라인(금지선)을 명확히 했다. ‘중국은 어떤 국가와도 (중국의) 핵심이익을 가지고 거래하지 않을 것이며 중국 주권과 안전, 발전, 이익을 침해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미국과는 신형대국관계를 맺자고 하면서 동아시아에서는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는 중국. 이런 이중전략에 일본은 가시적으로 중국과 위험스런 도박을 벌이지만 핵을 가진 북한을 머리맡에 두고 있는 한국은 애매하게 서 있다. 중국이 남한에 먼저 접근한 것은 한국의 국력이나 전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동북아의 지정학이 만들어 낸 특이한 현상일 뿐이다.

한국은 냉정하게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한반도 비핵화’를 공동 선언한 것이 대단한 성과인양 홍보하기 전에, 그것밖에 하지 못하는 힘의 한계를, 대한민국은 결코 중국과 대등한 친구가 될 수 없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한계가 있음을 냉철하게 꿰뚫어 봐야 한다. 냉엄한 국제관계 속에서 유사시 그나마 누가 우리를 위해 피 흘릴 만큼 도울 것인지도 명확히 따져봐야 한다.
2014년 7월 동북아에서 중국과 일본이 남·북을 상대로 제각기 총력을 펼칠 때, 러시아는 홀연히 유럽을 정치적으로는 절반으로 균열시키는 결정을 했다. 러시아에서 흑해를 지나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잇는 장장 2,400km의 파이프라인(일명 South Stream)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EU집행위원회가 강력히 항의, 사업 중단을 요구했음에도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중단은커녕 예정대로 2018년 완공될 전망이다. 러시아는 이렇게 천연가스 하나로 그간 우크라이나 사태로 궁지에 몰렸던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유럽의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가 40%에 이르는 경제적 현실이 반영된 결과이다.

4개 강대국이 맞대고 있는 동북아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까? 어쩌면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애매한 상황의 지속만이 현실적 해답이 될지 모른다. 이 어정쩡한 균형을 깰 유일한 길은 남·북이 하나 되는 길 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그렇기에 남·북의 통일이 동북아의 나머지 3개국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점이 설득되지 않는 한, 어떤 나라도 한반도 통일을 지원하거나 돕진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외교 전략은 모호하고 뻔한, 어느 곳에다 써먹을 만한 교과서 같은 문구가 아니라 ‘나는 네가 누구인지, 지난 날 무엇을 했는지 똑똑히 알고 있다’는 점을 상대에게 각인시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중국이든 북한이든, 일본이든 대한민국 대외관계의 기초는 그런 ‘사실의 인식’ 위에 구축될 때 친구든, 적이든 함부로 하지 못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