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일본,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지난 5월 말 북·일 간에 전격적으로 성사된 ‘스톡홀름 합의’는 동북아 국제질서에 해묵은 논쟁 하나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 북한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통해 정상적 국가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잊혀졌던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 북·일 합의는 내용 면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다. 북한은 여전히 경제제재 해제를 말하고 있고 일본은 납치자 문제의 원만하고 조속한 해결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에도 대북제재 해제와 일본인 납치자 재조사 실시가 ‘딜’ 조건이었다.


새로울 것 없는 합의에 북한과 일본은 왜 목을 매는가. 이번 교섭이 교착된 북핵 문제에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일본은 한미일 공조를 깨고 단독 플레이를 할 만큼 배짱이 두둑해진 걸까. 북한과 일본의 진정한 노림수는 무엇일까. 이번 합의는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남기는가. 여기에는 커다란 하나의 공통점이 자리하고 있다. 각자 내부 사정의 해법을 바깥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국교정상화는 마지막 단계에나 가능할 선언적 약속일 뿐이다. 미국과 중국의 눈을 피해 이 오래된 논의를 되살려보고자 북한과 일본은 저 멀리 북유럽까지 날아가서 협의해야만 했다.


1990년 9월 자민당의 막후 실력자였던 가네마루 신(金丸信)은 묘향산에서 김일성을 만나 정부 간 예비협상을 이끌어 낸다. 이는 그의 개인적 공명심에 돌출된 행동으로 일본 정가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당시는 냉전이 종식되고 한국은 북방외교로 대공산권 접근을 확대하던 시절이었다. 한·소 수교(1990.9.30)가 임박하자 김일성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 등소평을 만나 공식 후계자로 임명된 당시 48세의 김정일에게 중국의 변함없는 지지를 부탁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북·일 간 접근은 북핵 문제로 오랜 시간 교착상태에 빠졌다가 2002년에 이르러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가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 북일 간 최초로 정상회담을 하고 ‘평양선언’에 합의하면서 북·일 수교를 향한 교섭의 장(場)이 성큼 열리는 듯했다. 당시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관방 부장관이었다. 일찍이 일본의 조야에는 반일(反日)적이고 좌익사상을 가진 지식인이 상당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다. 고이즈미 내각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권부에서 눈에 띄게 줄어들었는데 이런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환경이 일본의 대외행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아베는 무엇을 배우고 느꼈을까.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기할 수 있다. 어쩌면 오늘날 아베의 정치적 행보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첫째, 평화헌법의 한계를 목격했다. 1999년 8월 대포동이 동해안을 날았을 때 망언제조기이자 자유당에서 일본 핵무장을 주장했던 극우의원 니시무라 신고(西村眞悟, 당시 방위청 정무차관)가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의 긴급소집을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 절차상 정식 소집될 수 없었다. 이때 영국처럼 여야가 공동으로 위기에 대처하는 유사(有事) 내각제도가 일본에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이는 집단적 자위권의 발동을 평화헌법 해석의 변경을 통해 이루려는 아베의 집념이 어디에 유래하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둘째, 북한에 의한 일본 납치자 문제의 국내정치 이슈화다. 사실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1990년 가네마루 신 방북 시는 물론 92년까지 8차례 북·일 교섭에서도 단 한차례 언급된 것이 전부일 만큼 핵심 이슈가 아니었다. 97년에 와서 납치피해자의 가족모임(가족회)이 출범한 후에야 일본 정치의 쟁점으로 부각한다. 납치자 문제의 해결은 국가의 역할과 정체성에 관한 문제로 일본인의 뇌리에 인식된 것이다. 이 둘의 발화 접점을 잘 아는 아베에게 대북 협상은 좋은 카드이다. 대북 접근은 순전히 일본 국내 정치적 필요에 의한, 그 필요를 100% 충족시킬 만한 국내 어젠다를 갖고 있는 정치적 재화이자 내부 국면타개를 가능케 하는 소재인 셈이다.


반면 북한으로서도 대일 단독 협상은 한-미-일로 이어지는 삼각 안보공조를 흔들고 주체사상을 가진 북한이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 않냐는 종속 이미지를 타파할 수 있는 ‘주체적인’ 호재이다. 김정일은 진작에 이런 일본 내부 사정을 꿰뚫고 있었던 걸까. 외교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2002년 회담 당시 납치자 문제를 ‘통 크게’ 인정했으니 말이다. 2006년 이후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동북아 안보위협을 높여가자 전세계적인 대북 압박이 높아지면서 뜬금없이 속도를 냈던 북·일 간 밀월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8년이 흐른 지금, 고이즈미의 정치적 아들인 아베와 김정일의 친자인 김정은은 대를 이어 전임자들이 해내지 못한 과제에 다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인물은 바뀌었지만 무대와 조건은 그대로이다.


만약 합의가 원만히 실행돼 북·일 국교 정상화를 향한 본격 교섭에 진입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당장 미국이 주도하는 북핵 해결을 위한 온갖 제도적 장치는 무용지물이 된다. 국교정상화란 양국 간의 포괄적 경제협력을 전제로 이뤄지는 일이기에 미국의 대북 억지력은 사실상 무력해지는 것이다.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는 가까운 장래에 현실성이 있는 걸까. 이제까지의 북일 교섭사는 아니라는 데 답을 주는듯 하다. 이번 북·일 합의에도 미국과 한국이 짐짓 태연한 배경이다.


오래전부터 일본에서는 북·미의 긴장관계가 북·일 접근의 배후에 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은 북·미의 긴장국면을 활용해 북한과의 접근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북·일 합의는 지난 8년간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6자회담의 부산물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이 급속히 발전한 것은 38도선이 벽이 되어 해양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본 주류사회의 인식이다. 다시 대륙국가가 되어 공산주의 중국의 한패로 들어가느냐는 한국민 선택의 문제라고도 한다. 통일이 곧 대륙국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에도 이들은 애써 이런 식으로 강력한 대한민국을 원치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미래는 더욱 해양국가의 시대라는 함의이다. 원조 대륙국가인 중국조차 자칭 해양국가라고 우기고 있다. 중국의 방공식별구역(CADIZ) 선포는 군사적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일본 현대사에서 최고의 총리로 꼽히는 나까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일본의 정치인들이 갖춰야 할 3가지 필수덕목으로 통찰력, 결단력, 설득력을 꼽았다(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 2001). 그는 문제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식으로 마무리될지 깨닫는 직관을 통찰력으로, 좋은 인재와 좋은 정보, 좋은 돈을 모으는 힘을 결단력으로, 국민과 외국에 대한 설명력을 설득력으로 정의했다. 일본의 정치인에게 필요한 요인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 특히 리더십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갖춰야 할 자질이다.


북한과 일본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고 가능해야만 한다. 그러나 핵을 가진 북한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일본도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다. 이번 스톡홀름 합의가 북한과 일본의 내부용 ‘정치 쇼’로 보이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