統獨 과정서 서독TV의 역할이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

1970년대 이후 동독정부가 주민들의 서독 방송 및 TV 시청을 허용했기 때문에 서독 TV가 동독혁명과 독일통일 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다. 동독정부가 서독 TV 청취를 허용한 것은 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데다 공산체제가 붕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동독혁명이 시작되자 서독 TV는 시위를 확산시키고 통일열기를 부추기는 촉매 역할을 함으로써 독일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동독정부의 서독 TV 시청 허용 배경

동독정부는 서독 방송매체들이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선전·선동도구가 된다는 점을 우려해 1950년대부터 동독인의 서독방송 및 텔레비전 청취를 금지해왔다. 1953년 6월 발생한 동베를린 인민봉기가 서독 리아스(Rias) 라디오 방송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외 정세의 변동에 따라 동독정부의 대응은 세 단계를 거쳐 변화되었다. ①1952년부터 1971년까지의 적극적 수신 방해 시기이다. 동독정부는 행정조직을 통해 서독 방송의 수신여부를 감시하는 한편, 공산 청년당원들을 활용하여 서독 TV 시청을 위한 옥외 안테나를 파괴하고 반국가적 선동이나 공무집행 방해 등의 죄목으로 형사처벌을 하는 등 서독방송 수신방해를 위해 적극 노력했다. ②1971년부터 1980년까지의 묵인시기이다. 공식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서독방송 시청에 대한 단속을 중단함으로써 사실상 허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③1980년 이후의 허용시기이다. 동독정부는 서독방송 시청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한편, 동독 TV와 서독 TV를 함께 시청할 수 있는 겸용 수신기를 생산, 보급했다.

동독정부가 서독 TV 시청을 허용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다음 몇 가지 이유가 주로 지적된다.

첫째, 서독방송과 TV의 시청을 막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SECOM 방식의 동독 TV 수상기로 PAL 방식의 서독 프로그램의 흑백시청이 가능했고, 100달러 상당의 겸용장치를 부착하면 컬러 수신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전파방해(jamming)를 할 경우 국경 및 베를린 지역 동독 주민들의 방송청취가 불가능해져 실행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서독방송 시청을 막을 적절한 방법이 없었다.

둘째, 주민불만 해소를 위해 서독방송 시청 허용이 불가피했다. 당초 동독정부는 서독방송 시청이 체제불안 요인이 될 것을 우려, 이를 금지시켰으나 이 조치가 오히려 가장 큰 불만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주민불만 해소를 위해 이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규범 등 국제규범 준수의 필요성 때문이다. 1970년대 초반 이후 동·서양 진영 간에는 물론 동서독 간에도 긴장완화와 협력 분위기가 확산된 데다 CSCE 규약에 정보자유에 관한 규정이 있어 이를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실효성 없는 서독방송 청취금지 조치를 고수하기 보다는 이를 공식적으로 허용함으로써 국내외에 자신감을 과시하고 독립국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넷째, 동독 지도부가 동독주민들이 서독 TV를 통해 범죄, 폭력, 마약 등에 관한 정보를 접하게 되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될 것이라는 엉뚱한 기대를 가졌던 것도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다섯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독 공산정권이 체제유지에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독 공산정권은 사회주의 최고의 선진 복지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더욱이 동독에 54만 명의 소련 군사요원이 버티고 있어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되거나 서독에 흡수 통일될 가능성이 없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서독 관계가 안정되고 동독이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감에 따라 1986년 5월 양측 간에 문화협정이 체결되었고 다음 해인 1987년 5월에는 방송협력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져 프로그램의 매매와 교환, 정보자료의 교환, 프로그램의 공동제작 등도 추진하게 되었다. 동독주민의 서독 TV 시청이 많아지자 서독 측은 동독주민들을 염두에 둔 프로그램도 방영했으며, 동독 측도 동독주민이 선호하는 스포츠 및 오락 프로그램을 대폭 증편하는 한편, 서방국가의 연속물과 폭력물, 동유럽 국가의 프로그램 등을 늘려 동독방송의 시청률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동독주민의 서독 TV 청취현황과 서독 측의 조치

분단 시 동독주민들의 서독 방송 및 TV 청취현황에 대해 조사한 자료는 많지 않다. 1985년 밤베르크 대학 헤세 연구원이 동독 이주민 2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TV 시청 가능자의 94%가 거의 매일(82%) 또는 자주(12%) 서독 TV를 시청했으며, 오락 프로그램 보다는 동서독 문제에 대한 토론 프로와 저녁 뉴스의 시청률이 가장 높았다. 그 대신 동독 TV를 자주 시청한다는 응답은 10%에 불과하고 72%의 응답자가 동독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고 답변함으로써 동독주민들에게 서독 TV가 가장 중요한 정보원천(information source)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독주민들의 서독 방송·TV 청취율이 높아짐에 따라 서독 방송국들은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동독 주민들을 목표로 한 프로그램을 방영했으며, 특히 미국 공보처가 소유한 리아스(Rias) 라디오 및 TV 방송은 동독지역 한가운데 위치한 서베를린에서 동독지역으로 전파를 발사했기 때문에 동독주민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서독 TV가 동독 평화혁명과 독일통일에 미친 영향

서독 라디오와 TV 방송은 동독 평화혁명과 독일통일 과정에서 ①정보 제공자로서의 역할, ②동독주민의 탈출, 시위 및 통일열망을 부추기는 촉매로서의 역할, ③동서독 주민 간의 의식차이를 줄이는 매체로서의 역할 등으로 동독 혁명과 독일통일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평소 동독주민들은 서독 TV를 통해 외부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독체제를 동경하고 동독체제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또 동독혁명 과정에서는 동독 내 타 지역에서의 시위상황, 동독 지도부의 동향, 서독 및 주변국가의 동향 등을 신속히 파악할 수 있어 평화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

둘째, 1989년 5월 이후 헝가리, 폴란드, 체코를 통한 동독주민의 탈출사태, 각 지역에서의 시위 상황, 동독 고위층의 호화생활 내용, 동독주민들의 통일열망 등이 서독 TV를 통해 생생히 보도됨으로써 동독 주민 모두가 함께 자극을 받고 용기를 갖게 되어 동독혁명과 통일열망이 추동력을 얻게 되었다.

셋째, 동독주민들이 평소 서독방송 토론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하고 각종 광고에 장기간 노출됨에 따라 동서독 주민 간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의 차이가 좁혀지고 특정 상품에 대한 선호도가 비슷해지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통일 후 동독주민들의 서독체제 적응을 쉽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통일 후 주요문제에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남북한 관계에의 시사점

우리의 경우 독일통일 시 서독 TV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고려, 일부 정치인들이 남북 간의 방송개방을 제안하고 각 방송국이 우리 연예인의 평양공연을 추진하는 등 북한과의 방송교류를 시도했다. 그러나 평양공연을 위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북한 특수층들만을 대상으로 공연을 했을 뿐 초보적인 방송교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과거 동독이 서독과의 문화교류에 매우 신중했던 점과 북한이 외부정보 유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우리의 적극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상호 방송개방이나 방송교류에 응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