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프라이카우프’에서 한반도 통일 준비 과정을 배우다

서독정부는 1962년부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7년간 총 34억 6400만 마르크 상당의 대가를 지불하고 동독 정치범 3만 3755명과 그 가족 25만여 명을 서독으로 데려왔다. 정치범 1명 당 약 10만 마르크(한화 5300만 원)를 지불한 셈이다.


서독 측은 공산치하에서 신음하는 동포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한다는 순수한 인도적 목적에서 이 사업을 추진했던 반면, 동독 측은 불만세력의 배출과 외화획득에 목적을 두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업은 인도적 측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동독 정치범의 서독이주로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의 형성이 지연되었다는 점이 통일 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정치범 석방거래의 추진 배경


동서독 정치범 석방거래는 1962년 서독 개신교연합회가 옥수수, 석탄 등 트럭 3대 분의 물품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동독에 수감되어 있던 성직자 150여 명을 서독으로 데려온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종교인들의 성직자 석방노력이 성공을 거두자 다음 해인 1963년 서독정부도 동독정부와 교섭하여 32만 마르크(약 1억 7000만 원)의 현금을 지불하고 정치범 8명과 서독에 부모를 가진 어린이 20명을 서독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성직자 및 정치범 석방노력이 결실을 거두자 서독정부는 이 사업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 추진키로 하고 세부 집행은 개신교연합회 간부진에 위임하여 기존의 동독교회 지원사업과 동일한 형식으로 추진토록 했다. 서독정부는 공산 독재체제 하에서 고통받는 동포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하겠다는 순수한 인도적 목적 때문에 이 사업을 추진했으며, 이 사업을 종교적 지원사업 형식으로 추진한 것은 이 사업이 동서독 간의 정치관계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과 이 사업이 노출될 경우 동독정부가 인신매매를 했다는 비난을 받아 사업이 중단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석방대상자 선정 방법


양측 간의 석방교섭은 서독 측이 석방 대상자 명단을 제시하면 동독 측이 심사 후 석방 대상자를 통보하고 상호 간에 몸값 액수와 지불방법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석방대상 범위는 반체제행위를 하거나 국경탈출을 기도하다가 투옥된 이른바 “분단으로 인한 정치적 박해자”에 국한시켰고 일반 형사범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서독 측은 동독 검찰, 법원, 교회 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와 동서독 주민들의 개별적 탄원 등을 근거로 석방 요구자 명단을 작성했으며 석방된 정치범 가운데는 불법탈출 시도자가 가장 많았고 서독 이주를 위해 의도적으로 범법행위를 한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동독 측은 일반 형사범을 정치범에 끼워 방출하려고 꾸준히 시도했는데, 서독 측은 석방 후 심사에서 일반 형사범임이 밝혀질 경우 몸값 지불대상에서 제외하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동독 측의 석방여부 심사에는 1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이는 정치범들이 1년 이상 수감생활을 하도록 함으로써 서독이주를 위해 의도적으로 범법행위를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몸값 지불 방법 및 교섭창구


양측 간의 석방대상 인원이 결정되면 몸값을 협의하는데 서로 양해된 몸값 기준이 있기는 했으나 정확히 적용하지는 않고 그때마다 총액 방식으로 결정했다. 이것은 인신매매의 성격을 희석시켜 동독의 체면을 세워 주려는 서독 측의 배려였다. 몸값 기준은 1963년부터 1983년까지는 1인당 4만 마르크, 1983년 이후에는 9만 5700마르크였으나, 이 기준이 정확히 적용되지 않은 데다 물자 수송비, 중개회사 수수료 등도 지출되었기 때문에 서독정부 지출액은 1인당 평균 10만 마르크를 상회했다.


양측 간에 보상액수, 제공할 물품의 품목과 수량이 결정되면 서독 측이 5개 민간회사에 의뢰하여 물자를 인도했다. 동독 측 요구물자는 초기에는 바나나 등 소비재가 많았으나 몸값 규모가 커지면서 점차 원유, 구리, 은, 공업용 다이아몬드 등 원자재와 외국에 되팔아 쉽게 외화를 얻을 수 있는 물품을 요구했으며 서독 측은 은을 제외한 대부분의 물품을 수입해서 제공해야만 했다.


서독 측이 동독 측의 현금지불 요구에도 불구하고 1964년까지 단 세 번을 제외하고는 몸값을 모두 현물로 제공했던 것은 서방 측의 대공산국 경화(hard currency) 지불 금지방침을 따라야 한다는 점과, 동독과 거래나 왕래 사례를 축적하는 것이 상호 간의 신뢰증진과 민족의 동질성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정치범 석방 후 가족의 이주는 자동적으로 허용되었는데 초기에는 약 6개월, 1970년대 이후에는 3, 4주가 소요되었다.


양측 간의 교섭은 서독 개신교 소속 변호사들과 동독 포겔 변호사가 담당했으며, 이 사업이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서독 교단이 동독교회 지원사업을 통해 동독 당국의 신뢰를 얻고 있었고, 동독 공산당원으로 동독 고위층의 신뢰를 받고 있던 포겔 변호사가 적극적으로 노력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통일 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동독 측에서는 비밀경찰 슈타지(Stasi)가 배후에서 조종했는데 통일 후 포겔 변호사가 슈타지 연루혐의로 체포되자 서독 종교인들이 보석금을 지불하여 석방시켰을 정도로 서독 측은 이 거래의 인도적 측면을 중시했다.


동서독 정부의 의도


서독 정부가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동독 정치범을 서독으로 데려온 것은 인도적, 도덕적 측면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서독 정부의 입장에서는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수많은 동독주민이 국경에서 사살되거나 투옥되는 현실을 방치한다는 것은 정치적,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동독정부가 정치범 석방거래에 응한 것은 인도적 시혜를 통해 공산정권의 관용성과 자신감을 과시할 수 있다는 점, 체제비판 세력을 방출하여 사회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점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동독이 외화획득에 목적을 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으나 통일 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거래를 통해 확보한 외화는 별도 계좌에 관리되어 주로 해외 선전사업이나 슈타지 공작사업에 사용되었을 뿐 무기구입 등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호네커에게는 매년 1억 마르크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지만 실제 사용금액은 많지 않아 통일 후 총 지불액의 60%가 넘는 21억 마르크를 회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측이 석방대가를 요구한 데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다. 대부분이 지식인이거나 기술자들인 이들 고급 인력을 데려가려면 이들의 양성비용을 배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거래가 30여 년간 철저히 비밀에 부쳐질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서독정부의 현명한 조치 덕분이다. 서독정부가 이 사업을 교회 측에 위임할 때 공식조직이 아닌 특정인사 개인에게 위임함으로써 관여인원과 행정절차를 대폭 줄일 수 있었고 예산항목을 비공개 항목으로 책정하고 감사는 심계원장(감사원장)의 총액 확인으로 대신했기 때문에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또 정치인과 언론도 이 사업을 흥미의 대상으로 삼지 않아 일반에 공개하는 일이 없었고, 동독정부가 반체제 인사들의 서독이주를 강요한 적도 있어 일반 국민들은 몸값이 오고가는 거래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범 석방거래의 득실


이 거래가 독일통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통일 후 의회에서 철저히 검토되었다. 긍정적 영향으로는 ➀동서독 주민 간의 인간적 유대와 정신사회학적 결합(psycho-social union)을 유지하는데 기여했고, ➁동독 주민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고무함으로써 동독 공산정권의 정통성의 본질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했으며, ➂다수의 지식인과 기능인들이 동독을 떠남으로써 동독 공산체제 붕괴에 기여했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부정적 영향으로는 ➀동독정권의 반체제 세력 약화 기도를 도와줌으로써 동독의 변화를 지연시켰고, ➁몸값이 주민생활 향상에는 기여하지 못한 채 집권층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되었고, ➂몸값 때문에 정치범이 양산되거나 서독이주를 위해 일부러 정치범이 된 사례도 많았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특히 몸값으로 제공된 물자가 주민생활에 좀 더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용도를 지정하지 않았다는 점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동독정권이 주민들을 볼모로 삼으면서 서독에 대한 견제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의 완화를 위해 때로는 동독정권과 타협하고 양보하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것이 서독정부의 입장이었다.


아울러 전체적으로 볼 때 정치범 석방거래 사업은 단기적으로는 동독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 완화, 양독관계 강화 및 독일통일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