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갑오년, ‘신(新) 한반도 책략’을 제안하며

1880년 9월 일본 수신사(修信使)로 파견되었던 김홍집은 조정과 나라 전체를 뒤집어 놓은 한 권의 전략문서를 고종에게 소개했다. 일본주재 중국 외교관 황쭌센(黃遵憲)이 쓴 ‘조선책략’으로 19세기 후반 당시 세계정세를 고려하여 조선이 살아나갈 길을 제시한 외교 전략서였다. 황쭌센은 이 시기 조선이 살아나갈 외교전략의 핵심을 ‘친중(親中)’ ‘결일(結日)’ ‘연미(聯美)’라는 국제관계를 토대로 부국강병을 도모할 것을 제안하였고, 고종의 명을 받은 조선조정은 즉시 내용을 회람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책략’이 19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국가의 생존전략으로서 나름 의미를 갖는 것은 영국의 세계패권이라는 국제질서를 토대로 동북아에서 조선이 취할 국가전략의 핵심을 ‘반(反)러시아’에 두었다는 점이다. “지구 위에 더할 수 없이 큰 나라가 있으니, 러시아라고 한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조선책략’의 주된 경계 대상은 바로 러시아였다. 따라서 ‘조선책략’은 아시아의 지리적 요충지인 조선에게 러시아의 남하 저지라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충고하였던 것이다. 만약 조선이 이러한 절박한 현실을 알지 못하고 ‘하(下)책’과 ‘무(無)책’으로 대응한다면 재앙을 면하기 어렵다는 경고 또한 담겨져 있다.
 
‘조선책략’의 권고를 수용하기로 결정한 고종은 이에 맞는 외교 전략을 수립하길 원했으나, 조선의 국내정치 사정은 이러한 국제정세를 이해할 정도로 성숙되지 못했다. ‘조선책략’ 내용이 알려지면서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구식군대의 반란인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1882년 임오군란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중국의 내정간섭을 불러왔으며, 그 결과 조선은 ‘조선책략’에서 가장 경계했던 러시아를 불러들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오류를 범했다. 조선의 개화파를 비롯한 민씨 세력은 ‘조선책략’의 제안과는 정반대로 점차 러시아에 기울고 있었으며, 이것은 세계패권국인 영국의 세계전략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조정이 국제정세에 얼마나 둔감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신을 지킬 최소한의 힘조차 갖지 못한 조선에게 세계패권 질서에서 떨어져 나간 대가는 혹독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에 더욱더 경도되었다. 결국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집무실을 옮긴 아관파천은 ‘대러 봉쇄’라는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조선의 운명을 일본의 종속변수로 전락시킨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21세기, 한반도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세기 초 치욕의 역사를 딛고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에서 가장 놀랄만한 정치·경제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한반도는 100년 전 새로운 문명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세계적 차원의 냉전은 이미 종식되었으나 한반도의 냉전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세계는 초국가적 다자간 통합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나 동북아는 100년 전 민족주의 역사로 회귀한 듯 갈등을 반복하고 있다. 

최근 동북아 갈등의 주요 원인은 전후 질서를 인정하지 않은 일본의 우경화 때문이다. 1993년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와 199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는 아베는 지난 9월 방미(訪美) 당시 “나를 우익 군국주의자라고 부르려면 불러라”며 전후 일본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가 우리에게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틈새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평양 지역의 ‘재균형(rebalancing)’을 선언한 미국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정책과 이를 막으려는 중국의 ‘신형대국관계’는 향후 동북아에서 미중의 패권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과거 영국의 세력균형전략에 충실히 복무했던 일본은 또 다시 미국의 세계전략에 편승하여 동북아의 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을 비난하면서도 집단자위권 등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딜레마가 교차하는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한반도 평화의 중요한 선결 조건이 북핵 문제 해결이 더욱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1차 북핵 위기는 1994년 7월 북미 제네바합의로 일단락되었지만, 2002년 부시행정부 등장과 함께 시작된 제2차 북핵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중국의 중재로 2003년 다자안보협의체인 ‘6자회담’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 내는 성과도 있었지만, 세 차례에 걸친 핵실험을 통해 확인된 북한의 핵 보유 의지는 꺾지 못했다.


또한 집권 3년차를 맞는 김정은 정권의 정치적 상황도 심상치 않다. 지난 12월 12일 북한의 실질적 2인자이면서 백두혈통의 후견인인 장성택이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반당반혁명종파행위’로 낙인찍혀 회의장 밖으로 끌려 나간 지 나흘 만에 ‘국가전복음모행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이 이슬로 사라졌다. 김정은이 아직 권력을 공고화하지 못한 상황에서 장성택의 숙청은 북한 권력 엘리트 집단의 권력 투쟁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다. 결국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향후 북한의 권력 변화는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안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2014년, ‘신(新) 한반도 책략’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30여 년 전 황쭌센의 ‘조선책략’이 그랬듯이 ‘신(新) 한반도 책략’의 핵심은 한반도와 동북아를 어떻게 조화시켜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21세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남북한뿐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와 통합의 문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독일통일의 기반인 ‘동방정책(Ostpolitik)’을 입안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독일통일을 독일 내부의 문제만이 아닌 전 유럽 통합의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 동서독 간의 평화정착과 동서유럽의 평화공존과 통합을 위해 헌신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반도와 동북아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의 핵심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다. 이 정책은 크게 두 가지 기조를 제안하고 있다. 첫째는 ‘신뢰 프로세스’를 통해 남북관계를 정상화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둘째는 항구적인 평화구조로서 동북아의 평화협력을 위한 ‘서울 프로세스’ 구상을 추진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한의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의 평화와 협력을 위한 ‘서울 프로세스’가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굴러가야 하는 개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박근혜 정부는 유럽통합의 출발점인 1975년 ‘헬싱키 프로세스(Helsinki Process)’를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제시하였다.

유럽이 1972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시작으로 1975년 ‘헬싱키 선언’을 통해, 동서 양진영의 교류를 촉진하고, 다자간 통합을 위한 제도화의 길을 나선 것은 분명히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유럽의 경험을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다른 한반도와 동북아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역사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21세기 바람직한 한반도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19세기 이래 세계 문명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한반도의 현실을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반도와 동양의 평화를 위해 동북아 삼국의 수평적 연대와 초국가적 통합을 주창한 문명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우리의 역사적 담론중의 하나다. 무엇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1945년 2차 대전 이후 시작된 유럽의 초국가적 통합의 역사보다 훨씬 이전인 1910년에 기록된 것이며, 그의 주장 또한 유럽의 통합과정에서 그대로 현실화됨으로써 이론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2014년, 동북아의 한중일 삼국은 100여 년 전 안중근을 다시 맞닥뜨리고 있다. 지난 2013년 6월 중국 방문 당시 박 대통령이 하얼빈역에 안 의사의 표지석 설치를 부탁했고, 중국은 놀랍게 안중근 기념관으로 응답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의 평화사상에 대한 한중의 태도와 달리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회견은 전쟁 범죄에 대한 아베 정부의 몰역사적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안중근은 100여 년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미완성의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분단의 역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의 완성본을 써 내려가야 하는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과연 그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그의 사상에서 녹아 있었던 동양평화의 대의는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의 죽음과 함께 묻힌 것이 아니라 오늘 새로운 한반도의 역사를 위해 다시 채워야 할 역사의 공백이다. 이것이 2014년 ‘신(新) 한반도 전략’을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