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전 대한민국은 국민 11명을 北에 버렸다”

북파공작원 김현희에 의한 1987년 KAL기 폭파사건에 대해선 지금도 많은 국민들이 기억하지만, 1960년대 말 북한 고정간첩에 의해 KAL기가 납치됐던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1969년 12월 11일, 강릉발 김포행 국내선 YS-11기가 이륙 25분 만에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함경남도 선덕비행장으로 납치됐다. 당시 YS-11기에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51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이 빗발치자, 북한은 1970년 2월 14일 39명을 판문점을 통해 귀환 조치했다. 하지만 11명은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지금까지 송환은커녕 생사확인조자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미귀환자는 기장 유병하, 부기장 최석만, 여승무원 성경희·정경숙, 승객 채헌덕·장기영·임철수·황원·김봉주·이동기·최정웅 등 11명이다.

11명의 가족들은 납치 39주년이 되던 지난 11일 납치된 가족들의 생사확인과 송환 운동에 나섰다.

▲ KAL기납치피해자가족회 황인철 대표 ⓒ데일리NK

MBC 프로듀서였던 아버지 황 원(당시 32세) 씨를 3살 때 북에 빼앗긴 황인철 대표를 만나 피눈물 났던 지난 39년간 사연과 단체 결성 배경을 들어봤다.

황 대표는 먼저 미귀환 납치자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는 ‘대한민국’을 질타했다.

“그동안 납북자라고 하면 6·25전쟁 납북인사와 국군포로, 전(戰)후 납북된 어부들만 알려져 있습니다. 1969년 KAL기 납치사건을 알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하루아침에 가장(家長)을 잃은 가족에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시련이 닥쳐왔다. 당시 3살이던 황 대표는 ‘아버지가 집에 오시지 않는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미국에 출장 가신 줄 알았던 아버지의 ‘진실’을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털어놓자 ‘간첩의 아들’이라는 놀림이 시작했다. 정신적 불안 증세를 갖고 있던 어머니는 그를 더욱 위축시켰다. 어머니는 아들이 자전거를 끌고 집 밖에 나가려고 할 때마다 “지금 어딜 가느냐? 그냥 집에 있어라”며 손을 낚아 채셨다. ‘편집성 인격장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지금 병원에 계신다.

단체 활동 계획을 묻자 황 대표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넘쳤다.

그는 “11명의 납치자 가족이 그동안 연락이 끊겨 현재 5명의 가족으로 단체를 만들었지만, 이후 다른 가족들로부터 연락이 올 것으로 기대된다”며 “납치사건 40년이 되는 2009년에는 생사확인 등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황 대표와의 인터뷰는 11일 ‘세계인권선언 60주년대회’ 일환으로 진행된 ‘1969년 KAL기 납치사건: 북한인권 다큐시사회’에 앞서 종로구 당주동 피랍탈북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KAL기납치피해자가족회’ 황인철 대표와의 인터뷰 전문]

-1969년 KAL납치사건을 소개해 달라.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51명을 태우고 김포로 향하던 대한항공기(YS-11)가 이륙 25분 만에 대관령 상공에서 승객으로 위장 탑승한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북으로 납치됐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은 탑승자들의 과거행적을 조사해 채헌덕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채 씨에게 포섭된 승객 조창희와 부조종사 최석만이 여객기를 납북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1970년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던 39명의 증언에 따르면 고정간첩이었던 조창희는 함경남도 선덕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북한 세단차를 타고 빠져나갔다고 한다. 납치 주범은 고정간첩 조창희다.

-납치자 50명(간첩 1명 제외) 중 39명만이 송환됐다.

우리 국가기록원은 30년이 지나면 자료를 공개하게 돼있다. 그런데, KAL기 납치사건 만큼은 아직까지 ‘비공개’로 묶여 있다. 2007년 9월 가족들과 함께 KAL기 납치사건에 관한 정보 공개를 요구하기 위해 국가기록원을 방문했을 때 ‘경찰청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경찰청에서 ‘불허’하고 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는 전달받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 1월 30일자 외교문서에 따르면 ‘KAL기 송환문제에 관하여 한국정부는 무조건 송환하여야 한다는 (기존) 방침을 바꿔, 대한적십자사 대표가 인수증에 서명토록 하는데 합의하였음’이라고 당시 미국 대사가 기록했다.

또, ‘이후에 적절한 경로를 통해 기체 및 조종사의 송환교섭을 추진하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완전한 송환을 못하고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당시 자료가 완전히 공개돼야 하고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나머지 가족은 왜 돌아오지 못했나.

당시 귀환자의 증언에 따르면, 강릉공고 선생님이었던 한 분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며 그냥 가게를 하는 장사꾼이라고 북측 요원을 속이려고 했다.

그러자, 북측 요원이 갑자기 파는 물건의 목록과 가격을 적으라고 지시했고, 또 불시에 또 찾아와 목록과 가격을 적으라고 했다. 북한 측에서 이 사람이 우리 체제에 필요한 사람인지, 필요없는 사람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했던 조치였던 것 같다.

지금 판단으로는 북한 체제에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을 구별해 가치가 있는 사람은 보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2006년 6월, 11명 납치자 생사확인을 북측 적십자사에 요청했는데 ‘생사확인불가’라고 통보를 해왔다.

-이후 부친에 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가.

▲납치 당시 MBC 프로듀서였던 황 원(당시 32세)씨는 북측의 회유공작을 거부하다 끝내 북한에서 실종됐다.ⓒ데일리NK

아버님은 영웅기질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귀환된 39명의 증언에 의해 알게 된 것인데, 당시 북한은 하루 4시간씩 납치자들과 사상논쟁을 가졌다고 한다. 아버님은 공산주의를 세뇌하는 북한 교관과 논쟁을 자주하셨다는데, 한번은 교관이 ‘이 새끼 남산의 백골로 만들겠다’고 윽박지르자 아버님은 ‘내가 백골이 된다고 해도 네 얘기는 도저히 못 들어 주겠다’며 맞섰다고 하셨다.

또, 북에서 납치자들에게 회식자리를 마련해 준 적이 있었는데, 이때 아버님이 ‘내고향 남쪽바다~’로 시작하는 가곡 ‘가고파’ 노래를 선창하니 그곳에 계신 분들이 노래를 따라 불러다고 한다. 그 다음날부터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살아는 계신지, 어디 수용소에 끌려가신 것은 아닌지 생사조차 알 수 가 없다.

-가족들의 송환 노력도 있었을 텐데.

1969년 12월에 납치사건이 터졌고, 다음 해 2월에 39명이 돌아왔지만, 나머지 11명이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당시 가족들은 1970년 3월 30일에 ‘납북KAL기 미송환가족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당시 여승무원이었던 성경희 씨의 부친 성충영 씨가 단체의 회장으로 10여 년간 활동을 했다. 50여 개국에 편지를 쓰고, 호소문들 보내며 국제사회에 가족송환을 호소했다. 하지만, 단체의 활동에 대해 정부가 압박을 했고, 국민적 관심이 점차 사라지면서 단체가 유명무실해졌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다시 가족들이 모이게 됐는데..

‘KAL기 납치피해자가족회’가 다큐시사회를 통해서 대외적으로 처음으로 알리고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11가족 중 5가족만이 참여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서로 연락과 정보를 주고 받으며 소통이 있었는데, 지금은 연락도 끊겼다. 오늘 행사 소식을 들으면 나머지 가족들도 연락이 올 것이라고 본다.

그 동안 납북자라고 하면 6·25전쟁 납북인사나 국군포로, 전후 해상에서 납북된 어부들만 국민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런데 ‘KAL기 납치사건’에 대해 말하면 대다수 국민들은 1987년 KAL기 폭파사건에 대해 언급할 뿐 1969년 KAL기 납치사건을 모르고 있는고 있다. ‘대한민국’이 그들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당시 납치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국가차원에서도 생사확인과 송환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바란다.

내년이 납치사건 발생 40주년이 되는 해인데 최소한 생사확인이라도 이뤄낼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할 것이다.

-그동안 가족의 고통도 컸을 것 같다.

아버지가 납치되셨던 당시 나는 3살이었고, 여동생은 갓 백일을 넘긴 갓난아기였고, 어머님과 할머니가 계셨다. 아버님의 납치로 우리 집안은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고 완전히 무너지게 됐다.

이후 어머니는 항상 주변상황을 불안해하는 편집성 인격장애가 생겨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계신다. 어릴적 어머니는 나에게 자전거도 못 타게 했다. 어머니는 내가 죽으로 가는 줄 알고 아무것도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치셨는지, 아버지에 대한 사진은 모두 오려내시고, “원수, 원수”라고 말하시며 살고 계신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가 미국에 출장 간 것으로 듣고 살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께서 ‘이제 너도 알아야 한다’며 아버지가 북한으로 납치된 사실을 알려주셨다. 이후 절친했던 친구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는데, 어느새 학교에서는 내가 ‘간첩의 아들’로 소문이 났다. 그때부터 나는 집 밖을 나가려 하지 않고 혼자 방안에만 있으려는 정신질환을 겪기도 했다. 또 주위 사람들과 제대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해 늘 싸우면서 살았다.

할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자신이 죽거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모두 흩어 버리고 싶다며 화장을 시켜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님이 돌아오실 때를 생각해서 결국 강원도 춘천 팔봉산에 안장했다.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살아계시면 72세다. 나에겐 3살 때 일이고 너무 오래전 일이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사실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고 한다. 아버지께 내가 올바르게 성장했음을 보여 드리고 싶다. 그리고, 꼭 살아계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