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권력자·주민들 간 ‘파워밸런스’ 변하고 있어”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반도로 하여금 국제사회 내 권력정치의 현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기제가 됐다. 이는 오랜 기간 편승(bandwagon) 위주의 정책을 꾸려온 한국의 상황이 권력정치의 ‘다자간 균형’ 상태를 특징으로 하는 탈냉전 시대를 맞이해 방향성을 상실해 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 혹은 외교 정책적 고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경계와 협력대상으로서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북한과의 공존은 한국정부로 하여금 편승 이후 외교정책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근본적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 드레스덴에서 한반도평화통일구상을 밝힌 지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을 언급했다.

다극적 질서로 빠르게 재편되어 가는 동북아시아 환경을 고려할 때, 소극적 분단관리를 넘어 국내·국제환경 변수를 포괄하는 통일전략이 반영된 보다 중장기적인 통일비전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국제사회의 체제 변화와 ‘상수(常數)’로서의 북한, 이에 따른 한국 외교정책 설정 문제에 천착해 온 윤영관(사진) 전(前) 외교부 장관과의 만남이 적실성을 갖는 이유다. 인터뷰는 지난달 29일 윤 전 장관이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윤 전 장관은 탈냉전 이후 진행된 전반적 국제체제 흐름을 주제로 한 저서를 집필 중이다. 이론과 실무 경험이 두루 담긴 그의 책은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 윤 전 장관은 현재의 국제체제가 “전환기적 상태”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한반도 문제는 결국 미·중 관계의 맥락 속에서 전개가 될 여지가 큰 만큼 한국정부가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중국과 신뢰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중첩적 외교”를 펼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대북정책과 관련해서는 북한 권력자들과 주민들 간의 ‘파워 밸런스(힘의 균형)’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비핵화 외교를 넘어선 사회·경제적 접근을 통해 보수-진보 진영 간 소모적 정책 갈등을 종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영 논리를 넘어 충분히 수렴 가능한 합리적 정책이 제시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음은 윤영관 전 외교부장관과의 인터뷰 전문]

-세계정세의 불안정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제정세의 변화상황이 향후 한반도 통일 과정에 어떻게 작용할 것으로 보나.

전반적 국제체제 흐름을 주제로 한 책을 집필 중이며 현재 정리 작업 단계에 있다. 현재의 국제체제는 권력의 중심이 어디인가를 놓고 이견(異見)이 표출되는 전환기적 상태라고 본다. 2008년 발생한 세계금융위기는 탈냉전 이후 국제체제의 변화에 분기점을 이뤘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미국의 상대적 파워가 최정상의 위치에 올라갔다면, 금융위기는 미국의 상대적 지위를 끌어내린 사건이었다. 향후 전개되는 국제질서는 다극질서라고 볼 수 있지만, 당분간은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다극질서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중 관계는 대단히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물론 크림(우크라이나) 사태는 미·러 관계 및 서방-러시아 간 긴장관계를 고조시키는 중요한 사건이다. 다만 이것을 신냉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왜냐하면 중국이라는 제3의 변수가 있는데, 중국과 러시아가 전술적 동조를 하고 있지만 양국 간 동조와 연계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두고 봐야 하는 상황이다. 이것이 냉전시대처럼 ‘양극’으로 나뉘어서 서로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한반도 문제는 미·중 관계의 맥락 속에서 전개될 텐데,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장을 위한 미·중 간 경쟁구도는 지속될 것으로 본다. 한국 입장에서 가장 유리한 상황이라면 양국이 한반도 통일문제에 관해 의견을 수렴하고 그런 가운데 국제적 합의하에서 평화적 통일이 이뤄지는 것이므로 한미동맹을 중시하면서도 한·중 관계를 심화시켜나가고 중국과의 신뢰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것, 즉 일종의 ‘중첩적 외교’를 펼쳐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은 경제건설과 핵무력 병진노선을 천명했다. 북한 정권은 합리적인가.

국가 행위자들이 정책결정을 할 때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일종의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이다. 나름대로 비용(cost)에 비해 편익(benefit)을 극대화하려는 맥락에서 북한 정권 역시 손익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준으로 북한의 합리·비합리성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문제는 북한이 손익계산을 할 때 우리 쪽에서 어떻게 대응을 하느냐에 있다. 예를 들어 핵무장을 놓고 봤을 때 핵을 개발하는 비용이 편익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북한으로 하여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책변환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냐의 문제다. 북한의 핵개발 노력이라는 것이 북한 정책결정자들의 계산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해당 프레임워크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 즉 핵개발의 비용이 편익을 훨씬 능가하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생각을 돌릴 수 있게끔 하는 조건 형성이 중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대북제재가 일정정도 이상의 효과와 효력을 거두기 위해 중국의 협력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을지 등의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핵을 포기한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 몰락,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상실 등의 상황을 봤을 때 북한의 정책변환 조건을 위한 환경은 더욱 악화되는 것 같다.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용편익분석을 하는 데 북한 정권이 고려해야 할 주요변수 중 하나는 국내 상황의 변화일 것이다. 이를테면 엘리트 내부의 단합 여부, 최고정책결정자(top leader)의 장악력, 경제적 상황, 주민들의 리더십에 대한 의식 변화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경제적 상황 및 리더십에 대한 주민들의 의식 변화, 시장 매커니즘 확산 등으로 인한 여러 형태의 개방 증대 등이 모두 복합적으로 대외변수, 즉 국제변수와 함께 어우러져 진행되는 것이므로 미리부터 비핵화외교를 포기해야 한다고 얘기할 필요는 없다. 국내 혹은 국제 상황은 늘 변하는 것 아니겠는가.

-북한 정권 스스로의 변화 의지가 희박하다는 점을 전제로 할 때,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 일관성 확보를 위한 정책제언을 한다면.

북한 정권, 특히 최고정책결정자의 변화 의지는 약하다고 본다. 적어도 우리 기준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내부사회는 북한 최고 권력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끊임없이 변화해오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식량배급체제가 무너지고 시장기제가 확산돼 오고 있는데 이는 정권담당자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진행됐다.

2009년 화폐개혁을 비롯해 시장기제 확산을 억누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하지 않았나.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도 엄청난 변화가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화폐개혁 실패 후 김영일 내각 총리가 지방 당 간부들 앞에서 사과한 일이나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이 처형된 일 등이 사실이라면 이 자체가 이전과는 다른 패턴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그만큼 북한 권력자들이 주민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얘기고, 이는 다시 말해 북한 주민들과 권력자들 간의 파워 밸런스가 점차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명약관화한 측면들이 대북정책 설정 과정에서 많이 고려될 필요가 있는데, 서방 혹은 미국 사회에서조차 이 같은 북한 내부의 변화가 가지는 정치적 함의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북한 문제의 증상(symptom)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핵문제와 대량살상무기에만 초점을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증상뿐 아니라 근본적 원인에 대한 해법 또한 동시에 추구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핵화 외교도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경제적 어프로치, 즉 교류협력을 통해 북한 주민들이 시장원리를 좀 더 많이 배우고 거기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대북정책을 놓고 국내적으로 갈등이 벌어지고 진영 간 극한대결이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소모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충분히 수렴할 수 있고 충분히 합리적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는데 엉뚱하게 싸우기만 할 필요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