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는 南영상 팔다, 父는 통화하다 수용소에 끌려가”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외부 영상물 때문에 보위부에 체포돼 고문을 받고, 결국 부모님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박명심 씨를 만나 증언 들어보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함경북도 온성군 삼봉구에서 태어나 계속 살았습니다. 19살 되던 2004년에 홀로 탈북했고, 한국에는 2006년에 왔습니다. 2년 정도 중국에 머물렀고요. 한국에 온 지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나름대로 어릴 때 한국에 온 편인데 이젠 30대가 됐어요. 그래도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습니다. 큰 아들이 10살, 둘째 딸이 4살입니다.

– 최근엔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북한에서 외부 영상물, 특히 한국 영상물을 접하는 건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어렵다고 봐야겠죠?

네, 쉽지는 않죠.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이 한국 영상물을 많이 접한다고 보면 될 겁니다. 10명 중 8명은 보는 것 같아요. 저도 북한에 있을 때 한국 연속극 많이 봤습니다. ‘사랑이 뭐길래‘ ‘보고 또 보고’ ‘장군의 아들’ ‘장미의 눈물’이란 드라마를 본 기억이 납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외부 동영상을 복사해서 가져오는 것이라 제목이 바뀔 수도 있다고 하는데, 제 기억으로는 그렇습니다. 영화도 ‘쉬리’ ‘편지’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 당시 한국 영상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사실 처음에는 제가 보고 있는 게 한국 드라마라는 걸 몰랐어요. 연변 방송으로 나오는 것을 본 것이었거든요. 처음엔 알판(DVD)으로 본 게 아니었죠. 나중에 DVD를 빌려다 봤을 때도 한동안은 연변 방송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배경이 중국이 아닌 것 같고, 너무나 재미있는 거예요. 계속 보다 보니 남조선 것이라는 걸 알게 됐죠.

– 북한에선 외부 방송을 마음대로 보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중국 TV 채널을 볼 수 있었던 건가요?

북한에선 TV를 구입한 후에 인민반에 신고를 합니다. 그러면 배전부에서 나와서 채널을 고정해주는데, 그 때 짜고 치는 것이죠. 고정했다는 딱지만 붙여놓고, 실제로는 고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 집은 채널을 돌리면서 중국 방송을 볼 수 있었죠.

– CD나 DVD로도 외부 영상을 보셨나요?

네, CD나 DVD는 대부분 중국에서 가져왔었는데요. 중국과 밀수하는 사람들이 한 두 개씩 DVD를 꼭 가져오더라고요. 정작 판매하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영상인지 잘 모른 채로 가져와요. 그런 후 DVD 플레이어가 있는 집을 찾아가서 같이 보자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보고 나서 괜찮으면 복사를 해서 판매하는 겁니다.

– 당시 명심 씨도 한국 영상물을 보기만 한 게 아니라 파는 데에도 연관돼 있었다면서요?

네, 물론 제가 판 건 아니었고요. 저희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저희는 중국에 친척들을 두고 있었는데요.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대아사 시기) 전까지 친척들에게도 지원을 많이 받았는데, 북한 당국이 대기근 시기를 지나며 중국과의 교류를 차단해버렸습니다. 그 이후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이 끊기면서 저희 가족들이 직접 장사를 해야 했어요. 그래서 중국에서 요구하는 물건을 가져다가 몰래 팔고, 그 대가를 받아오는 일을 어머니가 하시게 된 것이죠.

사람 욕심이라는 게, 한 번 장사를 시작하고 나니 돈 되는 물건은 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게 되더군요. 특히 DVD를 팔면 돈을 꽤 넉넉히 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중국에 북한 물건을 가져다가 팔고, 그 대가로 돈 대신 한국 영상물이 담긴 DVD를 받아다가 다시 북한에서 팔았죠.

– 어머니께서 한국 영상물이 담긴 DVD를 판매하는 일을 하신 셈인데, 그러다가 적발이 되셨다면서요?

네, 어머니가 DVD를 가져다가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만 팔고 계셨는데 그러던 어느 날 물건을 사갔던 사람이 잡힌 거예요. 보위부에서 DVD를 누가 팔았는지 출처를 대라고 추궁하니, 이 사람이 어머니를 지목했나 봅니다. 문제는 자신이 잡혀서 어머니를 출처로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저희 가족에게 하지 않은 거예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어머니는 꾸준히 DVD를 판매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동안 보위부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요. 왠지 좀 불안하다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저와 어머니는 물건을 받으러 회령으로 떠나게 됩니다. 저는 집을 떠나 어머니와 먼 곳에 간다는 게 그저 여행 갔고 좋았습니다. 회령에 도착해서는 어머니는 사람들을 만나 물건을 받기로 하고, 저는 청진으로 놀러갔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보위부에 잡히셨어요. 우리 모녀가 회령에 올 때까지 보위부가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죠. 모든 길목마다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놓은 뒤, 어머니의 뒤를 밟아 끝내 체포한 겁니다.

– 그렇군요. 명심 씨는 무사했나요?

저는 어머니와 같이 잡히진 않았습니다. 다만 청진에 나갔다가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오던 길에 잡혔습니다. 당시 어머니와 같이 묵었던 숙소에 들어갔는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다시 그 숙소에서 나오던 길에 잠복해 있던 보위부에게 체포됐습니다.

– 체포된 뒤에는 어떻게 되셨나요?

보위부 조사를 받았습니다. 사실 북한에선 조사할 때도 기준이 있어서, 본인이 속한 지역으로 이관돼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온성군 사람이니 회령시에서 조사를 받으면 안 되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체포된 이유가 외부 영상 유포라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저를 관할하는 지역으로 이관되지 않고 회령에서 바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사실 체포될 당시만 해도 보위부가 체포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왜 끌려와야 했는지 알지 못했어요. 다만 우리 가정에서 누군가 문제를 일으켰구나 하는 생각은 했죠. 어린 나이에 무덤덤히 조사를 받으니 보위부원들이 더욱 강도 높게 조사를 하더군요. 체포 이유는 말해주지 않아놓고선, 되레 제가 먼저 실토할 때까지 조사를 했죠.

– 명심 씨가 잡혔던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인데, 그 때도 주민들이 외부 영상을 많이 보던 때였나요?

지금처럼 많이 보던 시기는 아니었어요. 이제 막 보기 시작하고, 호기심 가질 때였죠. 그런 시기에 외부 영상을 유통하고 팔았다는 죄는 정말 북한 체제를 흔들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어요. 매우 큰 정치적 문제로 여겨졌죠.

– 체포가 된 후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나요?

어머니는 재판도 없이 정치범 혐의를 쓰셨습니다. 북한에선 공개재판을 여는 죄목이 따로 있고, 재판도 없이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는 죄목이 있는데요. 제가 알기로 어머니는 최고형인 15년형을 받고 정치범수용소에 가셨습니다. 물론 저는 온 가족이 다 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본인만 수용소에 가기 위해 저의 죄까지 모두 책임지셨습니다. 그 대가로 저는 풀려났고요. 저 역시 어쩔 수 없이 어머니가 외부 영상 유포 일을 하셨다고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풀려난 후 한 달 뒤에 어머니가 수용소로 가셨습니다. 그 때가 2004년, 저는 19살이었고요. 어머니는 40대 초중반 정도 되셨었네요.

– 이후 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들으신 게 있으신가요?

아니오, 정치범수용소에 가신 이후로 직접 연락을 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탈북해 한국에 온 후 우연히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는데요. 약 3년간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어머니 소식을 간간히 듣기는 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어머니를 수용소에서 빼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제가 보내주는 돈을 써서 정치범에서 경제범으로라도 바꾸려고 하셨대요. 그러면 풀려날 희망이라도 생기니까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까지 체포돼 수용소로 가셨어요. 제가 한국에 와 있다는 게 보위부에 의해 발각된 것이죠. 특히나 저희 가정은 어머니가 외부 영상을 팔다가 수용소에 가셨는데, 그 딸은 남조선에 와 있다고 하니까 더 큰 문제가 됐어요. 게다가 아버지가 저와 통화한 흔적이 담긴 휴대전화를 들키면서 연좌제를 적용받게 되셨죠.

– 안타까운 사연이네요. 사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외부 영상을 봤다는 이유로 이렇게 큰 처벌을 받지는 않는데요. 북한 당국이 이렇게 외부 영상 유통을 심하게 탄압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북한은 독재로써 체제를 유지해오는 나라입니다. 북한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은 오로지 나라 안에서 통용되는 법과 문화를 따라야만 하죠. 그렇다 보니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접하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다 막아버리는 겁니다. 외부 세계에 대해 일체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말라는 것이죠. 북한 주민들은 남조선 영상이나 다른 외국 문화를 접하는 순간 북한 체제에 대한 환상이 깨지게 될 겁니다. 당(黨)에 충성을 맹세하고 노래하던 사람들이 외부 세계에 눈을 뜨는 순간 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북한 정권도 아는 것이죠.

북한은 헌법 제 67조에서 공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에는 국경과 상관없이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정보를 추구하고, 취득하고, 또 전달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허락하지 않는 외부 정보는 모두 불법으로 간주돼 강력히 통제되며, 외부 정보를 접한 주민들은 처벌 받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 당국은 인간의 기본 권리인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즉각 보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