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영화 밀수 돕던 친구 공개총살 가슴으로 울었다”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중국을 오가며 2004년부터 2006년까지 2년간 외부 영상물을 밀수입했던 이현우 씨를 만나, 북한의 외부정보 통제 실태에 대해 증언을 들어봅니다.

– 이현우 씨 안녕하세요. 북한 당국은 외부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데요. 밀수를 통해서 외국 영상물을 북한에 퍼트리는 일을 하셨다고요?

네, 중국에 처음 갔을 때 한국 위성 방송이 나오는 걸 봤는데요. 그 당시 한국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온리유’와 같은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정말 재밌더라고요. 물론 북한에서 한두 번 한국 영화를 본 적은 있었지만, 드라마라는 걸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하도 재밌다 보니, 이걸 북한에 가지고 들어가면 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마침 사촌형 친구분이 비디오 대여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저더러 북한에서 유명한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 CD를 구해올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그 영화를 북한에서 가져올 테니, 대신 한국 CD를 북한에 가져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죠. 선뜻 허락해주더라고요. 그래서 공CD에 한국 영화 40~50개와 드라마 시리즈 2개를 넣어 북한에 가져갔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걸 팔 생각보다는, 북한에 가서도 영화나 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는 경비대 군인들과 우연히 만났다가 그들이 저더러 CD알(CD·DVD의 북한식 표현) 팔 생각 없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러면서 당시 북한 돈 500원을 툭 던져주더군요.

그 때까지만 해도 CD알은 혜산, 양강도 쪽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어서 제가 있던 함북도에서는 굉장히 귀했어요. 제가 CD알을 입수해오는 루트를 연 셈이죠. 그 전에는 혜산에서만 CD알이 들어오다 보니, 회령 쪽에서는 CD알 하나 값이 북한돈 700~800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저렴하게 파니까,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기더라고요. 물론 이 사람들도 자기네만 보려고 사는 게 아니라, 제 CD를 사서 다른 사람에게 다시 팔려고 사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내가 이걸 직접 팔면 더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도매를 해보자고 결심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청진 수남시장에 가서 북한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 CD를 50알 정도 사서 중국에 가져갔고, 대신 공CD에 한국 영화를 다운 받아 왔습니다.

당시 인기가 있던 한국 영화는 조폭이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세대들은 황색 바람에 빨리 물들더군요. 액션 영화도 인기가 좋았고요. 그런 것들을 CD알에 복제해 한 알 당 500~600원으로 팔았습니다. 드라마는 한 알  400원, 영화는 600원으로 팔았어요. 그 돈이 모이니 꽤 되더군요.

– 한국 영화를 담은 CD를 북한에 들여갈 때 어느 정도 양을 가지고 갔나요?

공CD도 많으면 무게가 꽤 되는데요. 드라마는 CD 한 판에 1회 분량인 40~1시간을 복제할 수 있고, 주로 16부작이나 20부작씩 방영하는 걸 모두 복제해갔습니다. 영화는 한 편당 시간이 더 기니 CD를 두 개로 나눠 복사했고요. 그렇게 다 모이면 300알 정도 됐습니다. 그걸 배낭에 매고 가져가는 것이죠.

– 영화 복제는 어떻게 하신 건가요?

공CD를 북한에서 가져가는 건 아니고요, 중국에 가면 DVD 대여방들이 있지 않습니까? 마침 제 사촌형 친구 분이 DVD방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찾아뵈면 공CD를 그냥 주셨어요. 아니면 적은 돈으로 살 수도 있었고요. 그걸 컴퓨터에 넣고 복제했는데, 처음엔 형님이 다 해주시다가 나중엔 저도 배워서 직접 했습니다.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영화를 다운 받아 CD에 굽는 방식이었죠.

– 그렇게 북한에 갖고 들어간 CD를 대여가 아닌 판매하셨단 얘기죠?

네, 판매를 하면 그걸 사간 사람들도 자기가 본 뒤 다시 팔게 돼요. 대여는 잘 하지 않습니다. 한 번 가져가면 잘 안 돌려주는 사람들이 많고, 또 달라고 했다가 괜히 해코지 할 수 있으니 그냥 팔아서 돈만 챙기는 것이죠.

– 보위부(성)의 단속은 어떻게 피했나요?

단속이 있기는 했지만 그 때 그 때 달랐습니다. 한 번은 지도국에서 탐지기를 가지고 돌아다녔어요. 핸드폰뿐만 아니라 TV가 켜져 있는 집을 찾아 단속하는 것이죠. 하지만 주민들은 그래도 커튼 치고 다 봅니다. 저도 친구랑 한국 영화를 보던 중에 보위지도원이 들이닥쳤는데요. 친구가 서둘러 CD알을 북한 영화로 바꿔 끼려고 했는데, 그걸 본 보위지도원이 괜찮으니 바꾸지 말라고 하더군요. 어차피 한국 영화 보고 있었던 것 다 안다면서, 그냥 술 한 잔 얻어먹고 갔습니다. 보위지도원들도 사실 담배 한 보루 넣어주면 모른 척 하고 갈 때가 많았습니다.

– 청진시 보위부장 아들과 한국 영상물을 본 적이 있다면서요?

네, 저희 친척 누나가 보위부장 막내 며느리로 시집을 갔는데요. 하루는 보위부장 아들, 즉 매형이 와서 같이 영화나 보자고 하더군요. 제게도 같이 보자면서 커튼도 내리지 않은 채 영화를 보더군요. 당시 제목이 ‘남자의 향기’였어요. 남자 주인공은 한국 와서 찾아보니 김승우라는 배우더라고요.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바치는 내용이었거든요. 물론 영화 보는 내내 옆에 보위부장이 있다는 게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설령 자기 아들과 저를 함께 잡아갈까 싶어서 그냥 계속 봤습니다. 매형이 말하기를, 그 영화 CD는 회수품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빼앗긴 주민이 정치범수용소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통제 세력들은 이걸 빼앗아서 보면서 주민들에게는 보지 말라고 하는 게 참 묘했습니다.

– 그렇게 한국 영화를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또 보고 싶다, 반복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다른 것도 보고 싶고요.

– 중국에 나가 한국 영화를 복제해 온 뒤 북한에서 판다고 하셨는데요. 물량이 다 떨어지면 또 중국에 나가신 건가요?

네, 북한에 와서 CD를 다 팔고 나면 다시 중국에 가서 구해옵니다. 물론 다른 일감을 찾아 중국에 가는 일이 많았지만, 돌아올 때는 꼭 한 배낭씩 한국 영화 CD를 가져왔어요.

– 북한에서 한국 영화를 직접 복제하는 건 불가능했나보군요?

그렇죠. 또 당시 북한 컴퓨터 성능이 좋지도 않았고, 저도 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 외부 영상물을 판매하거나 시청하다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그것과 관련해 제게 아픈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제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인데, 큰 아버지가 길주에 사셔서 그 쪽에 자주 놀러갔어요. 여자친구도 길주에서 만났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그 동네에도 한국 영상물을 들여오는 루트가 있었는데, 그 루트가 막히면서 제 루트로 영상물을 보급해야 할 때가 왔어요. 당시 길주에서 만난 친구들도 그런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와 같이 영상물을 공유하고 판매했죠. 제가 도매상이라면 그 친구들이 소매상인 셈인 겁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CD를 받는 대로 팔면 되는데, 그걸 차곡차곡 모아둔 채로 있었어요. 북한에서도 돈 가격이 오르고 내릴 때가 있는데,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느라 수백 장을 모아두고 있었던 것이죠. 하필 그 시점에 김정일이 남한 영상물을 보는 자와 유통하는 자는 적발 시 무조건 총살하라는 방침을 내렸습니다. 본때를 보이라는 것이죠. 시범겜이라고나 할까요. 그 때는 저도 조용히 있자는 생각으로 중국에 나와 있었는데,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CD를 모아뒀던 그 친구가 보위부에 잡혔다고요. 보름이 지났는데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친구들은 저더러 중국에 계속 있으라고 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랑 친구들 7명은 평소 방에 앉아 술 마시면서 김정일 욕도 하고 속상한 얘기도 나눠오던 사이였어요. 그래서 뭔 일이 터지면 같이 맞서자, 누구 한 명이 잡혀가면 꼭 지켜주자 하는 의리를 갖고 있었죠. 그러니 친구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북한에 들어갔고, 우회적으로나마 친구 부모님과 연락을 해봤더니 현재 아무도 못 만나게 감금해놓은 상태라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열흘 후 통지가 내려왔어요. 모두 장마당에 모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공개총살을 하겠다는 것이구나, 하는 걸 직감했습니다. 사실 그 때까지 아무런 조사도 이뤄지지 않고 연락도 닿지 않았다는 건 친구의 죄목이 정치범수용소나 교화소에 갈 만한 게 아니었다는 걸 뜻하기도 했어요. 모아 둔 CD가 수백 장인데, 총살을 피하지 못한 것이죠. 돈을 모아서 줘도 데리고 나올 수 없었습니다. 총살하라는 게 김정일 방침이었으니까요.

총살 날짜도 정확히 기억해요. 2005년 7월 1일이었는데요. 강둑에 있던 길주 장마당에 모두 모이게 해서 인민재판을 열었습니다. 그 때 친구를 포함해 3명이 끌려 나왔는데요. 두 명은 현장에서 바로 총살하더군요. 그런데 북한에선 총살 때도 바로 총살하는 게 아니라 살려줄 것처럼 희망 고문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이러한 죄를 인정하느냐고 물으며 살려줄 것처럼 시간을 끌다가, 갑자기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면서 총을 쏘는 겁니다. 아들이 죽는 걸 본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어요. 외아들이었거든요. 우리는 친구가 죽는 걸 보면서 눈물이 쏟아졌지만 소리 내 울지도 못했습니다. 친구와 죽기 전 눈이 마주쳤는데 희미하게 웃더라고요.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카락이 서고는 합니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죽음이라는 게 뭔지도 모를 나이였는데, 친구가 입에 제갈을 물고 눈을 가린 채 말뚝에 세워져 총살되는 걸 봐야 했어요. 70m 앞에서 지켜봤습니다. 그 때 나이가 25살이었네요. 

– 이런 처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계속해서 외국 영상물을 보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뭔가 새로운 걸 알게 되는 느낌 때문이죠. 한국에 대한 것도 그렇고, 영화 곳곳에 묻어나는 자유라는 걸 알게 되는 게 신기했어요. 북한에선 그저 장군님이니 수령님이니 하는 사람들에 충성심 유발이나 하고 있지만, 한국 영화는 순수한 애정 관계를 다루기도 하잖아요. 또 조폭영화를 보더라도 법을 지키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배울 수도 있고, 또 부당한 것에 항거하는 모습들도 목격하게 되잖아요? 이렇게 새로운 걸 배우게 되니 나이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외국 영상물을 보는 것이죠.

– 북한 당국은 왜 그렇게 외국 영상물 보는 사람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걸까요?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게 국제사회에선 아무 일도 아닌데 말이죠.

북한은 정권 유지가 돼야 독재를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북한 정권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게 황색 바람입니다. 황색 바람에 물들지 말라고 노래를 부를 정도죠. 개혁개방을 한다고 해도 그 영향력이 북한 주민들에게는 거의 가지 않습니다. 북한은 라디오나 USB, CD를 통해 외부 정보가 들어가는 게 정말 치명적이게 위험하다고 보고 있어요. 아마 북한 주민 1000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외부 정보 유입을 막고자 할 겁니다. 하지만 한국 문화의 유입은 북한에 분명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어요. 북한 민주화 반드시 일어납니다. 솔직히 주민들이 저항을 하기에 두려운 것도 있고 구심점도 없어서 지금은 참고 살지만, 언젠가는 문화적 영향 때문에 북한 민주화가 일어날 것이라 봅니다.

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권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외부정보를 접할 권리도 포함됩니다. 북한 당국은 외부정보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북한 주민들은 인류가 축적하고 발전시켜온 각종 정보로부터 차단돼 세계의 흐름에 뒤처지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제라도 외부 정보를 허용하고 주민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