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북송 재일교포들에 입대·승진 기회 원천 박탈”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일본에서 살다 북한으로 귀국한, 북한에선 일명 ‘째포’라 불리는 재일교포귀국자의 자녀로 태어나 사회적 차별을 당한 조충희 씨의 증언을 들어봅니다.

– 조충희씨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평안남도 평성에서 살았습니다. 평성에서 살다가 2011년 2월에 탈북해서 2011년 4월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 부모님이 재일교포 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원래 일본에서 사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일본 히로시마에서 사시다가 1960년에 북송이 됐고, 제가 1963년에 북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 지난 방송에도 돌격대에 지원하게 된 게 출신 성분에 대한 차별 때문이었다고 증언해주셨는데요. 재일 교포 출신자는 북한에서 어떻게 차별을 받는 거죠?
북한에선 출신성분을 핵심군중(핵심계층), 기본군중(동요계층), 복잡군중(적대계층)으로 분류하는데요. 귀국자 출신은 복잡군중에 속합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흔히 이야기하는 ‘권력의 중심’이란 곳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고요. 
– 직접적으로 차별을 당했던 경험도 많으실 것 같은데요? 
네, 한 번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였는데요. 그래도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참 잘 했습니다. 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졸업할 때 가슴 아픈 일을 겪게 됐습니다. 어느 날 중앙당에서 타자수를 뽑으러 왔는데, 전체 졸업반 학생 100명 중 3명의 예비 후보를 뽑는 자리에 선발 됐더라고요. 키도 170cm 이상이고 성적도 좋아 뽑힌 것 같더군요. 다음 날 아침 중앙당으로 (최종 선발을 위해) 오라고 해서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갔는데,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중앙당 지도원이 대뜸 ‘네가 조충희냐’라고 묻더니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영문도 모른 채 바로 퇴장을 당한 겁니다. 저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 다른 두 지원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상황을 물었는데, 이들에게 중앙당 지도원이 말하기를 ‘(조충희가) 키도 크고 인물도 잘 나고 성적도 괜찮긴 한데, ‘째포’라 안 될 것 같다’고 했다고 하더군요. 북한에선 귀국자들을 천대하는 말로 ‘째포’라는 말을 쓴답니다. 
가슴 아픈 일은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대학 추천을 받을 때도 차별을 겪어야 했는데요. 공부를 열심히 해왔으니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업대학과 같은 대학에 지원을 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없는 거예요. 성적상으로만 보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지만, 알고 보니 귀국자 자녀나 째포는 그런 명문대학에 입학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정말 억울했어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10점 채점법이 원칙이었는데, 9점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늘 10점만 받았죠. 그런데도 복잡군중에 속한다는 이유로 원하는 대학마저도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군대에 가서 입당하는 길을 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입대조차 거부를 당한 게 아니겠어요? 귀국자들은 믿지 못할 계층이라는 게 이유였습니다. 북한은 ‘계급의 총대’를 복잡군중에게는 메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칙은 1983년에 들어서서야 풀리더군요. 당시 군대도 가지 못하니 너무 화가 나서 몇 명 애들과 술을 마신 후 군대에 가게 된 사람들을 때려줬어요. 그래서 보안서에 잡혀가 한 달간 매를 맞기도 했었네요. 이렇게 군대나 대학에 가지 못한 채 남아 있는 비주류들이 몇 명 있었는데, 때마침 속도전 돌격대가 대원들을 선발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돌격대에 들어가게 됐죠. 
– 돌격대 복무를 끝내고 대학에 진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수의축산대학을 선택하셨는데요. 원해서 가신건지, 아니면 재일교포귀국자 출신이라는 점을 의식해서 수의축산대학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북한에서 대학이나 전공 선택의 기회라는 건 주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저와 같은 귀국자 출신은 (기회 박탈이) 더 심하죠. 제가 돌격대에 있을 당시 제 처지도 모른 채 금성정치대학이라는 데 지원서를 냈는데요. 그런데 이 학교는 김일성의 이름을 본 딴 데서부터 알 수 있듯이 청년일꾼을 양성하는 곳이더군요. 그래서인지 지원서를 낼 때부터 서류상 8촌까지 모두 신분 증명을 해야 했는데, 저는 귀국자 출신이다 보니 북한엔 4촌까지 밖에 없었어요. 보안서에서도 제 증명서에 ‘5촌은 남조선에 있어서 증명이 불가하다’는 딱지를 붙어서 주더군요. 이래서 귀국자 출신들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축산이나 농업, 기계 대학 위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저는 그 중에서나마 운이 좋아 축산 대학에 가게 됐고요. 
– 대학 졸업 후에는 3대 혁명 소조 활동을 또 3년간 더 하셨네요. 이후 직장 배치를 받으셨는데, 어느 직장으로 가셨나요?
일단 직장을 배치 받을 때도 신분적 차별을 당해야 했습니다. 같은 축산 대학을 다니더라도 성분이 좋으면 중앙당에서 이들을 따로 추려 직장을 배치해 줍니다. 학생의 성적이나 인성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죠. 반면 성분이 좋지 않으면 내각의 대학생 배치 과에서 학생들을 본인 출신 지역 현장 기사로 보내요. 저도 평성 출신이라서 평성 축산 부문에 배치됐죠. 그렇게 지역 당 위원회 산하 경영위원회의 축산과에서 일하게 된 겁니다. 
– 행정 관료가 되신 셈인데요. 이후에도 차별이 있었나요? 
네, 직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고, 승진 기회도 좀처럼 오지 않더군요. 경영위원회에 입사해 약 4년 정도 되는 해에야 승진 기회가 왔어요. 새로운 부서가 생기면서 그 자리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죠. 저와 다른 한 명의 지원자가 경쟁하게 됐는데, 사실 북한에선 승진을 하는 데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들이 뒤따라요. 뇌물도 상당히 많이 바쳐야 하고, 일정 정도 경력도 있어야 하죠. 또 학교 성적은 물론 지난 시간 조직 생활을 얼마나 성실하게 했는지도 확인돼야 합니다. 물론 저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10년간 속도전 돌격대에서 복무하며 입당도 했고, 대학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 성적도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승진에서 밀리더라고요. 제가 경쟁에서 밀리는 건 귀국자라는 신분 뿐이었는데도 말이죠. 게다가 저와 경쟁한 지원자는 저보다 대학도, 경영위원회 입사도 후배였어요. 제 밑에서 지시를 받으며 일했던 사람인데, 신분 때문에 제가 떨어지니 참…비서국에서 말하기를 ‘같은 값이면 귀국자는 떨구라’라고 했다더라고요. 우리 위원회 성원이 100명 정도 됐는데, 모두 제가 승진할 것이라 예상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경쟁자의 신분이 너무 좋았던 것이죠. 삼촌이 중앙당 유학생 배치과에 있었는데, 그 사람의 입김이 상당히 많이 작용했다고 하더군요. 

– 당시 심정이 어떠셨나요? 
정말 억울했습니다. 저는 당과 수령을 위해 충성을 다하면 알아줄 것이란 말에 정말 열심히 노력한 게 전부였거든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 차별 받고, 돌격대에서 대학 지원하면서 차별 받았지만 그래도 계속 열심히 일 했어요.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게 하려고 노력했고, 힘든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하겠다고 나섰죠.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당하다 보니, 제가 힘든 것도 문제지만 가족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속상하더군요. 그래서 더 이상 관료로서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 장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마침 당시가 고난의 행군(1990년대 후반 경제난) 시기였는데, 차라리 시장에서 장사나 해 돈을 벌자는 생각 끝에 직장에서 나왔습니다. 

– 그렇군요.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요?
2000년 초에 탈북을 결심하게 됐는데요. 당시 아들이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아버지가 직장에서 차별 받고 결국 장사하겠다고 돌아선 걸 보면서 아들이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래서 아들이 권투를 시작했어요. 북한에선 체육이나 예술 분야로 두각을 나타내고 국제경기에서 메달을 따오면 평양에도 거주할 수 있게 해주잖아요? 집도 주고 직장도 주고요. 그러니 아들이 이를 악물고 3년간 권투를 한 것이죠. 그 결과 한국식으로 말하면 국가대표, 북한식으로 청소년종합으로 선발됐습니다. 그렇게 아시아경기에 나갈 기회가 주어졌는데, 아들마저도 경쟁자에게 성분으로 밀려서 경기에 나가지 못하게 된 겁니다. 안 그래도 부모로서 아들이 링 안에 들어가 매 맞는 걸 보는 게 가슴 아팠는데,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경기마저 못 나가게 되니 정말 속상하더군요. 아들도 속이 많이 상했는지 권투를 그만두겠다고 하더랍니다. 
그 때 정말 죄스러웠어요.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만나서 자식이 이런 피해를 입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저 역시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어요. 그냥 일본에서 살았으면 이런 차별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면서요. 그 때 부모님들은 아무 말씀도 못 하시고 한숨만 깊이 쉬셨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해요. 그래서 당시 ‘안 되겠다, 뭐라도 해봐야겠다’고 결심 하던 찰나에 마침 평성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유행하고 라디오 방송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제 부모님들의 고향인 남조선에 대해 알게 됐고, 끝내 ‘이런 사회에서 자식들을 공부시켜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죠. 그렇게 탈북하게 됐습니다. 
– 지금 한국에서 사시면서는 북한인권 실태를 알리고 개선을 촉구하는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한 사람의 탈북민으로서 북한 당국에 전할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주민들이 시장을 통해 자체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북한 당국자들이 할 일은 없습니다. 그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핵을 만들고 있는데, 핵은 결코 만능의 보고가 될 수 없습니다. 핵에 매달리는 구렁텅이에서 나와,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과 소통했으면 합니다. 또 주민들도 더욱 자유롭게 해 우물 안에서 나오게 했으면 좋겠고, 그것이야말로 진정 북한 당국자들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북한 당국은 자신들이 평등한 사회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차별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거주하다가 1959년에서 1980년 사이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교포 귀국자들은 학교에 들어갈 때도, 입대할 때도, 직장에 배치될 때도 어김없이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도 조직에서 고위급 직위에 오를 자격은 애초에 없는 것입니다.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회적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