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KAL기 납북가족 송환요구에 ‘대결책동 산물’ 주장”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지난 1969년 12월 11일 대한항공, KAL기 납치 사건으로 아버지와 생이별을 한 ‘KAL기 납치피해자가족회’의 황인철 대표와 함께 당시 사건에 대한 증언을 들어봅니다.

– 먼저 부친을 잃게 된 KAL기 납치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간략하게 설명해주시죠.

제 나이 두 살 때였습니다. 지난 1969년 12월 11일 강릉발 김포행 국내선 YS-11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정오 12시 25분에 이륙 후 10분 만에 북한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강제로 납치됐습니다. 기수가 대관령 상공에서 북한으로 가게 되면서 북한 전투기 두 대가 호위를 했고, 이후 연포비행장에 도착하게 됐죠. 국제사회 비난 여론에 의해서 북한이 이듬해인 1970년 2월 4일에 전원 송환을 약속해줬습니다. 하지만 돌연 약속을 어기고 같은 해 2월 14일에 승객 39명만 송환해줬습니다. 당시 비행기에 탑승했던 분들이 승무원 4명, 승객 47명으로 총 51명이었는데요. 그 중 간첩이었던 한 명을 제외하고 50명 중에서 승객 39명만 돌아온 것이고, 여전히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 그 당시 왜 북한 당국은 11명을 돌려보내지 않은 것일까요?

돌아온 39명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저희 아버지가 북한 당국에게 국제법과 국제관습법 그리고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집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상교육 시간에 공산주의 이론에 관해 조목조목 반박하시고 당신들이 틀렸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사상논쟁을 벌이신 것이죠. 1970년도 1월 1일에는 ‘가고파’라는 노래를 부르셨다는데, 그 노래를 듣고 공산당 군인들이 와서 저희 아버지를 끌고 갔다고 합니다. 이후 돌아온 승객 39명은 모두 저희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가 ‘가고파’를 부르신 1970년대 1월 1일부터 승객 39명이 송환된 1970년 2월 14일까지 저희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었던 것이죠. 그 전까지는 북한 당국이 대동여관과 평양여관에 승객들을 분류해서 학습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 결국 이 사건은 고정간첩 조창희가 벌인 것이었는데요. 전문가들과 탈북민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납치사건을 벌인 북한 기관은 중앙당 연락소 작전부였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즉 조창희는 중앙당 연락소 작전부 공작원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납치 당시 황인철씨 아버님의 연세는 어떻게 되셨나요?

젊은 나이였습니다. 32세였습니다.

– 당시 부친은 무슨 일로 강릉에 가셨다가 서울로 오는 길이셨나요?

그 때 저희 아버지가 MBC방송국 편성 계장으로 계셨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편성회의가 있었는데 보도부장님이 바쁘다면서 ‘황원(황인철 씨 부친) 씨가 대신 참석해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1969년 12월 11일에 12시 25분 비행기에 탑승하시게 된 겁니다. 그 편성회의는 강릉MBC와 대전 MBC 등 각 지방사 방송국 담당자들이 서울로 모이기로 한 모임이었습니다. 

– 당시 황인철 씨는 두 살이었다고 했는데, 혹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남아 있나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어요. 다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죠. 저는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살았는데, 늘 아버지는 언제오시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현재 미국 출장 중이고, 곧 돌아오실 거라고만 하셨어요. 납치 사실을 말하지 않으신 것이죠. 그러면서 크리스마스면 돌아오신다고 하셨어요. 저희 어머니도 아버지를 계속 기다리신 것이죠. 언제쯤 오려나,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저도 크리스마스만 손꼽아 기다렸고, 그렇게 막상 크리스마스가 왔는데도 아버지가 오지 않으시면 실망하면서요. 오해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 돌아오지 않으신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후에도 저희 어머니는 제게 아버지의 납치 사실을 말씀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저는 작은 아버지와 큰 아버지를 통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황인철 씨를 비롯한 가족들이 겪었을 어려움이 컸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어요?

물론입니다. 특히 저희 어머니가 트라우마를 겪게 되셨는데요. 멀쩡히 출장 갔던 남편이 북한으로 납치를 당한 것이잖아요? 그러니 어머니는 모든 평범한 상황들도 본인에게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느끼게 되신 거예요. 그런 두려움 속에 갇히게 된 것이죠. 그래서 제가 자전거를 산다든지, 어디에 혼자 간다든지 하면 돌아오지 못할까봐 늘 두려워하셨어요. 생활고는 두 번째로 쳐놓고요. 사람이 자신의 일을 기획도 해야 하는데, 어머니는 늘 두려움 때문에 그러지 못하셨어요.

– 황인철 씨는 꽤 오랫동안 부친을 비롯한 납북자 송환을 위해 목소리를 내 오셨는데요. 이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가 있을까요?

네, 큰 계기가 있었습니다. 2001년 제3차 이산가족상봉에서 저희 아버지와 같은 비행기를 탔던 스튜어디스 성경희 씨가 어머니와 상봉을 했습니다. 그 상봉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요. 공교롭게도 당시 제 큰 딸이 두 살이었습니다. 딸을 안고 TV로 그 장면을 보는데, 참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우리 아버지는 납치됐을 때 두 살짜리 자식이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더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를 찾고, 모자상봉을 하고, 송환시키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죠.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KAL기 납치 사건을 완전히 다 잊어버렸어요. 사람들이 KAL 납치 사건을 김현희 씨의 KAL기 폭파사건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단체 이름을 1969년 KAL기납치피해자가족회라고 정한 이유도, KAL기 폭파사건이 아니라 KAL기 납치 사건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일 어려웠던 건 과거의 사건이 현재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말을 들으면서 KAL기 납치사건을 알리는 일이었는데요. 또 그것을 알리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는 생활고 등도 제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 아버님의 송환을 위해서 해온 활동으로는 무엇이 있었나요?

대표적으로 2010년 6월 17일 국내 납북자 중 처음으로 저희 아버지의 생사와 소재지를 확인해달라고 하는 진정서를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비자발 실종 실무반’에 접수하게 됐습니다. 이에 북한은 2012년도 5월 9일에 저희 아버지에 대한 답변을 보내왔는데요. 그런데 북한은 저희 아버지가 강제 실종에 해당되지 않고, 유엔 강제적·비자발 실종 실무반에서 다룰 인도주의적 사안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아버지를 찾겠다는 제 노력이 북한 적대세력의 의한 대결책동의 산물이라고 했고요. 지금까지도 이와 같은 답변만 계속 오고 있습니다.

– 최근 유엔총회 3위원회에서 통과된 북한인권결의안에는 납북 외국인을 즉각 석방하라는 내용이 담겨서 주목을 받았는데요. 앞으로 KAL 납치 사건도 주목을 받을 수 있을까요?

KAL기 납치 사건은 굉장히 특이한 사건입니다. 강제 실종 및 외국인 납치 사안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북한이 워낙 납치를 조직적이고 은밀히 진행함에 따라 사실증거를 확보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북한은 조직적으로 사람을 납치해가는 과정에서 흔적을 없애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밝혀내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KAL기 납치 사건은 분명 역사적인 사건이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사건입니다. 1970년 2월 14일에 납치됐던 승객 중 39명이 돌아와 명확히 증언했습니다.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이 북한에 강제 억류돼 있다고요. 특히 저희 아버지가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북한에 반박을 했었고,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강력히 주장했으며, 집으로 가고 싶다는 가사의 ‘가고파’라는 노래를 불렀다고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본 북한 측이 아버지를 끌고 갔고, 그 이후로 누구도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도 밝혔습니다.

그래서 당시 국제적십자위원회가 다시 한 번 북한 당국에게 요구를 했습니다. 39명의 증언에 따라 11명이 북한에 여전히 강제 억류돼 있음이 증명됐다, 그러니 북한은 11명을 송환하라고요. 그런데 북한은 돌아가지 않는 11명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북한에 머무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에 국제적십자위원회가 다시 제3국과 제3자를 통해서 그들의 자유의사만 이라도 확인해보자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북한은 답신 한 장으로 이를 거절합니다. 그 상태로 47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다른 노력들도 많았습니다. 1970년 7월 국제민간항공기구에서는 비행기와 승객 그리고 승무원들이 본래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하라고 북한 당국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내놓았고요. 1970년 9월 9일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다시 한 번 모든 유관 당국자들이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협조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도 나옵니다. 1970년 제25차 유엔총회에서는 항공기 불법 납치 규탄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아버지를 포함해 11명은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 그동안 간접적으로라도 아버지의 소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네, 저는 저희 아버지가 평양 근교에 살아 계시다는 소식은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생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고 만나야 해서 여전히 이 일을 놓지 못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올해 79세가 되십니다.

–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북한 당국의 태도일 텐데요. 북한 당국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북한은 1983년 항공기 불법 납치 억제에 관한 협약에 비준했습니다. 그리고 항공기 내에서 발생한 범죄 및 기타 행위에 관한 협약에도 비준했습니다. 이 협약들에 의하면, 저희 아버지를 포함한 11명을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북한이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그리고 비준한 이 협약에 의해서 저희 아버지와 납치한 승객들을 송환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싶습니다.

– 북한에 계신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아버지와 목욕 한 번 하기가 이렇게나 힘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 아버지의 송환을 위해, 그리고 생사확인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만나 뵙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6·25 전쟁 당시 납북된 사람과 국군 포로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전쟁 이후에 북한 당국에 납치된 사람도 516명이나 됩니다. 황인철 씨와 가족은 하루 아침에 북한 당국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가슴 아픈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 두 살이던 황인철 씨는 아버지가 집에 오시지 않는 이유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이들 납북 피해자들의 아픔은 행방불명된 가족이 그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북한 당국은 강제 납북자들을 지금 즉시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