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에 KAL기 강제 납치자도 포함시켜야”

통일 한반도, 누구나 꿈꾸는 미래일텐데요. 통일을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연구하고 또 일하고 있는 전문가들과 이야기 나눠보는 ‘통일대담’ 시간입니다. 제 20차 이산가족 상봉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상봉자뿐만 아니라 온 국민들이 기뻐하고 있지만 오히려 가슴을 부여잡고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한국 전쟁기에 헤어진 이산가족은 아니지만 북한의 강제적인 민간 비행기 납치로 가족과 이별한 아픔을 가지고 계신 분들인데요. 지난 1969년 북한의 대한한공이죠. KAL기 납치사건으로 아버지와 생이별한 KAL기 납치 피해자 가족회의 황인철 대표도 그 중 한 분이십니다. 16일 이 시간 황 대표님 모시고 이야기 들어 보겠습니다.


1. 대표님. 여쭤보기가 참 조심스러운 부분인데요. 이 방송 듣고 계실 북한 주민들께서는 KAL기 납치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또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르실 것 같습니다.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나이 두 살 때였습니다. 지난 1969년 12월 11일 강릉발 김포행 국내선 YS-11 여객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정오 12시 25분에 이륙 후 10분 만에 북한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강제로 납치가 된 사건입니다. 당시 탑승객은 승무원 4명과 승객 47명으로 총 51명이었습니다.


1-1. 납치된 사람들 중에 몇 명이 한국으로 송환된 건가요?


당시 국제사회의 빗발치는 비판 여론에 의해 북한이 1970년 2월 4일 날 전원 송환을 약속해 줬어요. 그런데 돌연 약속을 어기고 1970년 2월 14일 승객 39명만 부분 송환됐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하신 분은 저희 아버지를 포함해 11명입니다.


1-2. 그런데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생사 확인도 안 해주고 아예 납치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건가요?


북한이 이 사건에 대해서 부인하는 것 자체는 말이 안 되고요. 당시 돌아온 39명의 증언에 의하면 저희 아버지가 공산주의 사상 교육 시간에 반박을 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북한당국에 강력히 요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2주 동안 어딘가에 끌려가셨다가 오셨는데 그리고 나서 1970년 1월 1일 날 가고파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북한 당국에게 강력히 항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당국에 끌려가서 결국 자기들(돌아온 39명)이 판문점 통해서 송환될 때까지 저희 아버지를 보지를 못했다라고 증언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북한이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설득력이 없는 얘기고 그것은 거짓말 입니다.


2. 가슴이 아프시겠지만 아버님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당시 대표님이 2살 때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대표님 아버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저희 아버지는 당시 MBC방송국에 피디로 근무를 하셨고요. 비행기에 탑승하게 된 이유는 서울 MBC에서 편성계획회의가 있어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탑승하시게 된 겁니다.


3. 그 당시 남한으로 돌아오신 분들 중에서 유감스럽게도 대표님의 아버지를 포함한 몇 분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전원이 남한으로 돌아와야 하는데요, 아버님을 비롯한 몇 분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알고 계신가요?


돌아온 39명의 증언에 의하면 11명이 자유의사를 밝히지 못하게 된 것이고요. 그리고 당시 1970년도 3월에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제3국과 제3자를 통해서 자유의사를 확인해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때 북한 당국은 본 상황은 공화국의 송환이므로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이 문제에서 손을 떼라면서 답신 한 장으로 거절을 했죠.


4.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저도 너무 화가 나는데요. 당시 한국 정부는 아버님의 송환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나요?


아마 한국정부의 노력은 1970년도, 1971년도까지만 노력을 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시 국제사회를 통해서 많은 부분을 노력했다고 하지만 결국 한국정부 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노력했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5. 이 과정에서 아버님의 의사는 전혀 반영이 안 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이 아버님을 억류했던 명분은 무엇이었나요?


2011년도 3월에 제가 대한적십자총재의 명으로 국제적십자위원회를 통해서 북한적십자위원회에다가 저희 아버지를 포함해서 11명의 생사확인을 하는 전문을 발송했습니다. 북한은 2011년도 10월에 그에 대한 답변을 보내줬는데요. 답변에는 “남으로 돌아가지 않은 자들은 자의에 의해서 북한에 머무는 것이며 이들의 생사확인은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11명이) 북한 땅이 좋아서 머물러 있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죠.


6. 국제사회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 당시 국제사회 차원의 대응은 무엇이었나요?


1970년 6월 말, 7월초 제17차 특별총회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라고 있습니다. 그 곳에서 비행기와 승무원, 승객들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이 나오게 됐고요. 1970년 9월 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결의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970년 제 25차 유엔총회에서 항공기 불법 납치 규탄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면서 국제사회가 굉장히 크게 분노를 했죠.


7. 아마도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황 대표님께서 직접 나섰을 텐데요. 부친을 비롯한 납북자 송환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과정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거창하게 전체 납북자를 위해서 운동을 한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아버지가 자유의사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 아버지가 자유의사를 밝혀 반드시 우리 땅으로, 우리 집으로 송환돼야 한다는 신념하에 저는 운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6년도 6월에 북한적십자위원회가 대한적십자사를 통해서 생사확인 불가라고 하는 통지서를 보내줬어요. 저는 그 통지서를 보면서 느낀 것은 북한으로 납치된 내 아버지가 살아계셔도 북한에 계실 것이고 돌아가셔도 북한에 계실 것인데 생사확인 불가라는 통지서 자체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통지서를 들고 이런 답변이 세상에 어디 있나 하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서 대한민국 정부를 찾아갔죠. 다음 후속대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대한민국 정부는 납북자는 이산가족으로 분류가 돼 있고, 이산가족으로 분류돼 있기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면 정부가 북한 측에 전달은 하지만 북한이 어떠한 답변을 준다고 하더라도 이산가족의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정확한 답변을 들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대책방안은 전혀 없다는 말을 듣고 제 자신이 납득이 되지 않고 말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속적으로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추진했어요. 강릉시청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캠페인 운동을 진행했고요. 2010년 6월 17일 유엔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 비자발 실종 실무반에 국내 납북자 중에는 처음으로 저희 아버지를 접수하면서 국제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왔습니다.


8. 그 이후에 아버지에 관한 소식은 전혀 못 들으신 건가요?

공식적으로 아버지에 관한 소식은 전혀 듣지 못하고 있고요. 비공식적으로 듣고 있는 것도 사실관계의 확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말 못할 고통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9. 지난 9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있었던 활동도 연관돼 있을 텐데요. 유엔인권이사회 본회의 건물에서 북한 당국에게 납치 혹은 강제실종을 당한 희생자 가족들의 목소리를 듣는 기회가 마련됐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행사였나요?


9월 21일이였어요. 강제 실종문제를 다루는 패널토론회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에 있는 납치피해자 가족들은 참여하지 못했어요. 대신 일본에 있는 납치피해자 가족이 참석해서 패널토론회를 함께 했습니다. 저희는 유엔인권이사회 회의에서 납치 피해 문제를 국제사회에 얘기할 수 있는 뜻 깊은 자리가 마련돼 많은 얘기를 하고 왔습니다.


10.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한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KAL기 납치사건’도 새롭게 조명 받을 수 있지 않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많습니다. 실제로도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나요?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습니다. 저는 단순히 KAL기 사건을 알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느냐, 너희 정부는 무얼 하고 있느냐면서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저는 그러한 시작을 통해 국제사회와 같이 다시 한 번 북한 당국에 자유의사를 밝힐 수 있게끔 대단히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11. 이번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해서 대표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상봉을 하시는 가족들은 행운아죠.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만나지 못한 가족들의 꿈이고요. 가족은 가족과 만나야 되고, 가족은 가족의 체온을 느껴야 하고, 가족은 가족의 채취를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헤어져서 사는 것은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얘기고요. 이번에 상봉에 포함되지 않아서 안타깝지만 만나는 상봉을 통해 만나는 가족들은 얼마나 큰 기쁨 속에 있을까 생각하면서 저도 그 날이 오기를 간곡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12. 대표님은 부친을 비롯한 납북자분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실 텐데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우리가 앞으로 해야 될 문제는 1970년 2월 14일 당시 부분 송환된 39명이 돌아오고 11명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이분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이유는 지구상에 단 한 가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를 포함한 열 한분은 반드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국제사회의 힘과 함께 자유의사를 밝힐 수 있게끔 북한당국을 강하게 압박하는 것이 큰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13. 북한 당국이 늘 유심히 듣고 있는 것이 저희 방송입니다. 하고 싶으신 말이 많으실 텐데요. 이 방송을 듣고 있을 북한 당국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북한인권 문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통해 얘기를 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부인을 한다고 하면 상대 쪽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 KAL기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고, 아직도 비행중이고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과 국제 관습법, 인도주의적 원칙과 절차에 따라서 저희 아버지가 송환돼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우리 가족을 돌려보내줄 것을 촉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