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기반 ‘통일 당위론’ 흔들리고 있다

남북한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다, 남북은 같은 민족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자명한 진리처럼 별 생각 없이 반복한다. 정치 단체나 언론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많다. 엄밀하게 말하면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 국민 대부분은 ‘남과 북은 국가가 다르지만 같은 민족이다’란 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남과 북이 왜 같은 민족이냐고 물으면 이상한 질문으로 받아들일 것 같다. 언어도 비슷하고, 문화도 비슷하고, 1945년까지 단일 국가의 전통이니 당연히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 역사를 보면 남북한처럼 언어와 문화가 비슷하지만 서로 분명히 다른 민족으로 여기는 사례가 예상보다 많다.


예를 들면 독일 통일 이후 통독은 독일어를 하는 유일한 국가가 아니다. 오스트리아는 똑같은 독일어를 쓸 뿐만 아니라 스위스에서도 전체 인구의 72%가 독일어를 모국어로 여긴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 국민도 스위스 국민도 자신들을 분단국가의 국민으로 보지 않고 독일과의 통일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다. 중남미에 위치한 20여 개 국가는 거의 다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문화적 차이도 크지 않다. 그들의 국경을 결정했던 변수는 1800년대 초 스페인 제국의 붕괴와 혁명 군벌의 투쟁 과정, 식민지 시대에 있었던 행정 구조와 같은 우연한 요인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는 각각의 민족의식이 강해서 서로 전쟁을 하며 싸운 적도 있다. 지금 남미는 정치적인 통일을 지향하는 세력이 전혀 없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은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이지만 같은 민족이 아니다.


중동에 위치한 20여 개 아랍 국가들은 같은 언어 및 이슬람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통일을 원하지 않다. 이들 사례를 보면 언어나 문화의 공유가 무조건 같은 민족을 만드는 요인이 아니다.


그러면 그 요인은 무엇인가? 민족주의 역사 연구 부문에서 최고 인기 전문가로 불리는 앤더슨(Benedict Richard O’Gorman Anderson) 교수는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부른다. 바꾸어 말해서 민족은 공유한 언어나 문화 같은 물질적인 것보다 공유한 의식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고 본다.


민족은 제일 먼저 이 민족에 속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한다. 물론 언어나 역사적인 경험의 공유는 민족 이념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결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입장에서 보면 남과 북은 아직 같은 민족으로 여길 수 있다. 이남에서도 이북에서도 국민들이 자신을 같은 민족으로 보는 이유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남한 사회의 내부적인 정치 대립에도 불구하고 이남에서 모든 정치 세력은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한 ‘진보’도, ‘보수’도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의심을 표시하지 않는다. 주지한 바와 같이 국회의원과 같은 정치인이, 우리나라에서 통일은 필요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정계 은퇴 선언과 다름이 없는 짓이다.


그러나 남한의 분위기를 더 자세하게 보면 통일에 대한 지지가 식어가는 증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민족의식은 같은 경험에 의해 재생산된 것인데 남북한만큼 일상생활의 경험이 서로 다른 이웃 국가를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1990년대 말은 북한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굶어 죽은 기근 시대였으나 남한에서는 체중 감량을 위한 다이어트가 화두로 떠오르는 시대이다. 1990년대 북한 경제 붕괴가 남한 국민들의 소득에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었지만 같은 무렵에 멀고 먼 태국에서 발발한 화폐 위기로 한국 경제는 흔들리게 되었다.


동시에 세월이 갈수록 남북 개인 관계도 약해지고 있다. 분단 참극의 상징이 된 이산가족 문제를 보면 지금 북한에 남아 있는 친구, 가족들을 직접적으로 기억한 사람들은 무조건 75세 이상이다. 10여 년 이후에 남한에서 북한이란 나라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이북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한적 있는 사람들은 탈북자들 뿐 일 것이다.


특히 젊은 사람들의 북한에 대한 무관심이 심해지고 있다. 40~70세 남한 주민들은 북한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별로 없지만 북한 문제가 남한 국내 정치와 직결되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강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60세 이상 남한 주민들은 한국 전쟁을 어느 정도로 직접적으로 기억하고 멸공통일의 교육을 많이 받았으니 북한을 적으로 보면서 관심도 비교적으로 많다.


다음 세대인 386세대는 좌익 학생 운동이 강한 1980년대에 김일성 독재에 대해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환상을 극복하든 말든 상관없이 지금까지 북한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다음 세대인 40세 미만 남한 국민들은 이러한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북한이 그들의 일상생활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아서 때때로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킬 수 있는 이웃 국가에 불과하다. 세월이 갈수록 이러한 경향이 더 뚜렷이 나타날 것 같다.


독일 통일의 쓰라린 경험이 남한 내 잘 알려지게 되었을 때부터 국민 대부분은 통일을 민족 이념의 실현보다 경제적인 재앙의 시작으로 보는 경향이 생겼다. 독일식 통일의 길을 걷는다면 남한 경제가 심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논리는 거의 상식이 되어버렸다.


물론 남한 사람들은 학교에서 교육 받는 대로 ‘통일이 우리 소원’ 이라고 반복하지만 통일비용 우려를 비롯한 여러 이유 때문에 통일이 늦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