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붕괴-北정권 붕괴 무엇이 다른가

1991년 무렵 북한의 붕괴를 예언하지 않은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당시의 국제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기대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 말부터 40여년간 존재해온 공산주의 진영은 빠른 속도로 부서지게 되었다. 1989년은 동유럽 사회주의 역사에서 마지막 해가 되었는데 그해에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급진적인 개혁을 시작했다.

1989년 12월에 루마니아에서 북한의 ‘수령제’와 비슷한 점이 많은 차우체스쿠의 가족독재가 시민봉기와 고위 간부들의 음모에 의해 전복되었다. 한국처럼 수십 년 간 분단국가로 존재해왔던 독일은 동독 주민들이 공산주의를 거부하면서 서독과의 즉시통일을 요구하니까 듯밖에 흡수통일을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북한 붕괴를 예언하는 것은 논리적인 결론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06년에도 북한 사람들은 김父子 체제하에서 살고 있다. 이 기간동안 북한사회가 많은 변화를 경험한 것은 이미 알려지는 사실이다. 2006년의 북한은 1991년의 북한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크다.

북한은 체제붕괴를 피했고 중국식 시장화 개혁도 피하면서 계속 공산주의 정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대동강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 ‘기적’은 무료로 나온 것이 아니다. 정권의 생존을 위해 북한 백성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잃어야 했다.

북한: 공산권에도 유례없는 절대적 통제

북한은 국가의 절대적 통제를 체현하는 사회이다. 물론 다른 공산국가에서도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감시하려 노력했지만 이같은 감시체계를 북한만큼 절대화한 국가가 거의 없었다.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고향인 소련의 경우에, 가장 악명 높았던 1940년대 말에도 북한의 ‘인민반’과 같은 제도는 없었고, 주민들이 국내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외국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라디오도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었다.

1960년대에는 사회적 자유의 공간이 더 넓어져 비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독립단체, 예컨대 미술과 같은 취미생활을 위한 단체도 생겨났다. 또 소련 주민들은 일정 수준의 정치토론과 비공식적인 정보교류를 개인끼리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단체나 비공식 개인적 관개는 나중에 소련의 민주화 운동과 체제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확대되는 기반이 되었다.

동유럽 국가에서는 이러한 자유가 소련보다 더 컸다. 1950년대 말 이후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주민들이 공산당 정권에 직접 도전하지 않으면 주민들의 개인생활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러한 ‘관대한 입장’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면 우리와 동맹자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 다름 아닌 수십 년 동안 헝가리 공산당 총비서로 지낸 야노시 카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 특히 동유럽 공산권 국가에서 시민사회의 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이나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직접 도전하진 않았지만, 체제의 여러가지 잘못들을 자기네끼리 논쟁했고 비공식적인 정보를 교류했다.

간부나 군인들이 아니라면 개인적으로 정부와 공산주의를 비판해도 경찰에 잡힐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1970-80년대 공산권 경제가 계속 나빠지긴 했지만 먹고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서 지식인들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논쟁과 검토를 할 여가가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또 이러한 상황에서 도덕적 권위를 갖춘 인물이 점차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물들은 주로 학자나 예술인들이었는데, 이들은 공산당 정권을 직접 비판하진 않았지만 정부와 거리를 멀리 유지했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에 등장한 민주주의 정치인 중에 이러한 유명한 사람들의 출신이 적지 않았다.

1985년 소련에서 경제, 사회개혁이 시작됐을 때 공산권 국가에서 민주화 운동을 위한 바탕은 이미 형성되었다. 국내 사정이 바뀌자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은 비정치적인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들은 몇 년 지나 정치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공산주의 시대에 도덕적인 권위를 쌓은 이들은 이 운동의 지도자나 상징적인 대표자로 등장했다.

국내 사정: 반대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 정책

그러나 북한은 다른 공산권을 따라 가지 않았다. 1950년대에 북한 권력층은 스탈린 비판운동을 하지 않았다. 계속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소련 모델’보다 더 엄격해졌다.

물론 북한에는 아무런 비공식적인 활동도 없었다. 북한정권은 주민들에게 무조건 복종과 수령에 대한 ‘불 같은 충성’을 요구했고 동유럽이나 소련 공산당의 관대한 입장을 ‘수정주의’로 보았다. 김일성의 북한에서는 ‘개인 생활’이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통제했으며 체제에 대한 동요를 무지비하게 진압했다. 결국 다른 공산권 국가와 달리 북한에서는 시민사회의 싹이 자라지 못했다.

1980년대 말 공산권 국가는 경제위기에 직면했고, 이러한 문제를 종합적인 개혁정책을 통해 극복을 시도했다. 공산권 정부는 자신들의 기반이 얼마나 약한지 몰랐기 때문에, 주민들이 이러한 개혁정책을 열심히 지지하면 ‘국영 사회주의’의 재생을 가져올 것으로 희망했다.

그러나 약간의 자유를 얻은 주민들은 이 틈을 타고 정부에 대해 더 많은 자유, 무조건 자유를 달라는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개혁정책은 드디어 이 체제의 붕괴를 초래했다.

북한 권력자들은 소련과 동유럽의 개혁운동을 처음부터 위험한 정책으로 판단했다. 합작회사운영법이나 8.3 소비품 증산운동과 같은 조치가 보여주는 듯이 1980년대 말까지 북한정권은 온건한 경제개혁이 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개혁에 대한 입장이 엄격해졌다. 1990년을 전후하여 공산권 국가 대부분이 개혁개방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을 때 북한에서는 개혁에 대한 의심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 무렵 북한 권력자들은 개혁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에게 그 어떤 변화를 바라지 말라” 고 한 김정일의 말이 이 정책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이 전략은 수십 만명의 농민들을 죽이는 식량난을 초래한 결정이었지만 김왕조와 그의 측근들의 입장에서 보면 옳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60만 명이나 100만 명의 주민들이 굶어 죽었을 때에도 수만명에 불과한 평양 특권층은 그대로 벤츠를 타고 일본식 스시를 먹고 자식들을 비싼 해외학교에서 공부시켰다.

식량난은 시민사회와 민주운동이 생길 수 있는 기반을 더 약화시켰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은 나라의 사정과 정치를 분석할 시간과 힘이 없었다. 지식인들이나 중산층 대부분이 먹을 걱정밖에 모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혁명이란 민중이 가장 어렵게 살 때 일어날 줄 알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세계 역사 경험이 여러번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절망적인 곤경에 빠진 사람들은 혁명을 시작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북한의 경험은 슬픈 교훈을 가르쳐 준다. 국내에서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의지가 있는 정부는 전복하기 참 어렵다는 교훈이다. 동유럽 국가는 북한보다 자신의 백성들의 이익을 더 중요시했고 어느 정도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이들 나라에서 체제의 붕괴를 초래했다. 반대로 주민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반체제 세력을 무자비하게 없애는 북한 권력층은 지금도 특권을 누리고 있다.

국제 압력을 당하지 않은 북한 독재

북한정권의 생존 이유 중 또 하나는 국제정세다.

소련과 동유럽의 위기는 서방진영과의 냉전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냉전시대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은 공산주의 체제를 심한 지정학적인 도전으로 보고 소련체제를 내부로부터 훼손시키려고 많이 노력했다. 국제인권운동도 소련문제에 대해 많은 주의를 돌렸다. 물론 인권운동의 목적과 서방의 전략적 이익이 완전히 비슷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권 운동가와 서양 정치인들이 서로 도와 주어 마침내 공산주의 체제의 변화와 붕괴를 야기했다.

서방진영이 가한 압력의 형태는 매우 다양했다. 경제부문에서 소련은 유태인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에게 이민의 자유를 제공해야 서방으로부터 일정한 무역 양보를 받을 수 있었다. 서방 정부와 비정부 단체들은 소련내 인권운동과 종교 자유운동 그리고 민주운동을 지지했다. 공산권 주민들에게 세계에 대한 정보 그리고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라디오 방송을 대대적으로 했다. 물론 서방세계가 주적(主敵)으로 본 소련에 지원이나 일방적인 양보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에 이러한 대외 압력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이유는 북한체제의 붕괴를 바람직하게 보는 해외 세력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의 분단 유지을 환영하고 북한을 완충지역으로 보는 것 같다. 러시아는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지지한다. 일본은 한반도에 영향을 미칠 수단이 별로 없지만 통일한국의 등장을 별로 좋은 소식으로 보지 않을 것 같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수십 년 동안 북한과 생사투쟁을 해온 남한도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독일통일의 경험과 국내 정치 변화로 말미암아 북한의 붕괴를 악몽처럼 보게 되었고 이러한 시나리오를 피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북한체제의 변화를 소망하는 나라는 미국뿐이지만 미국도 북한에 대해 얼마나 더 주의를 기울일지 알 수 없다. 사실 핵문제를 제외하면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은 결코 중요한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나중에 핵문제가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된다면 북한은 미국의 시야에서 없어질 것 같다.

그래서 1960-70년대의 소련과 달리 북한은 대외적인 압력을 당하지 않고 있다. 물론 해외로 나오는 정보는 객관적으로 북한독재의 기반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외부의 어떤 계획된 노력의 결과라기보다 내부의 자연발생적인 과정으로 보인다.

외부세계의 대북한 방송은 시간이 너무 짧고 다른 대북한 선전활동이 거의 없다. 외교 부문에서도 북한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갖춘 국가들은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도 않고 북한 국내정책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는다. 서울 정부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1990년대부터 남한 대북정책의 기본 목적은 통일을 연기시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부문은 북한과의 경제협력과 무역이다. 북한은 정권수립부터 외국의 지원을 먹으면서 살아온 나라이지만 1990년대까지 지원을 제공한 나라는 동맹국 소련과 중국이었다. 그러나 10년 전부터 북한을 위한 지원은 중국뿐 아니라 미국, 남한, 일본에서 나오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아직 북한과 ‘전쟁 상태’를 끝내지 않은 나라들은 북한정권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북한 안에서 민주, 인권운동을 하는 기회가 있을 경우에도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자는 정치세력이 없다. 사실상 지금 북한정권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공화국 압살책동’을 계속 반복하는 김정일 독재는 사실상 유리한 국제환경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면 세월이 갈수록 북한정권의 사정은 어려워질 것 같다. 식량난과 경제위기 때문에 정부의 통제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북한 백성들은 남한을 비롯한 해외의 생활에 대해 배우게 된다. 결국 북한 정권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같은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저서 :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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