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정치 만든 장본인 김일성, 김정은 보며 무슨 생각할까?

진행 : 김정은 정권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바로 ‘공포정치’라 할 수 있습니다. 용인술에 능했다고 평가되는 아버지 김정일에 비해, 아들 김정은은 고령의 간부들은 물론 자신의 고모부까지 무차별하게 숙청하며 공포정치를 이어가고 있는데요. 그런데 김정은 시대의 공포정치, 북한 주민들에겐 마냥 새로운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수십 년 전 김일성 역시 정치적 경쟁자, 즉 정적(政敵)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권력을 다져왔기 때문인데요. 오늘은 데일리NK 최송민 기자와 함께 김일성의 숙청 정치를 되짚어보겠습니다.

1. 김일성의 숙청 정치 역사를 살펴보려면 우선 김일성이 어떻게 권력을 잡게 됐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일제 해방 후 북한이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김일성의 정치적 입지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해방 후 북한 정권이 처음 수립될 때만 해도 간부들은 지금처럼 김씨 일가를 맹목적으로 옹호하거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김일성이 가장 높은 수상 자리에 있었지만, 남한에서 공산 활동을 펼치다 올라간 남로당의 박헌영과 만주에서 독립활동을 해온 연안파 김두봉, 소련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일을 담당했던 소련파 허가이 등 다양한 계파들도 중추적 역할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김일성은 전쟁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정권유지를 위해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섰던 것이죠. 김정일도 자신의 노작을 통해 “우리 수령님(김일성)의 전 생애는 ‘반(反)종파투쟁’ 역사”라고 언급했었습니다. 김일성이 반대세력 모두 ‘종파분자’로 몰아붙여 숙청했다는 점을 아들이 시인한 셈입니다.
 
이처럼 김일성은 해방 후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구호 아래 지주, 자본가계급과 그 자녀들을 숙청했고, ‘사회주의 기초축성시기’로 규정한 1950년대 중반에는 ‘반 종파투쟁’으로 북한 정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온 주요 인사들을 하나 둘씩 숙청하기 시작한 겁니다.
  
2. 정권 수립 직후 노동당 내에서도 정치적 파벌 싸움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김일성이 위협을 느낄 만한 정적들도 있었는데요, 아까도 잠깐 말씀하셨지만, 다시 한 번 대표적인 인물들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은 1949년 말 김일성과 함께 소련의 스탈린을 찾아가 6·25전쟁을 밀담하고 주도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실패 책임과 미국 고용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습니다.

소련파의 우두머리 허가이 역시 남로당의 스파이 루머를 변호하다가 숙청당했습니다. 이후 김일성은 숙청 범위를 점차 넓혀갑니다. 연안파 계열의 내무성 부상, 문화선전부 부상 이필규와 정률, 주영하, 그리고 국내파 오기섭 등을 숙청하고 연안파에 속해 있으면서 당과 김일성의 독재를 비난한 부수상 최창익과 박창옥도 숙청해 버리고 말죠. 동시에 연안파 우두머리 김두봉 등도 투옥된 이후 숙청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북한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1956년 ‘8월 종파’ 사건입니다.

군부를 장악하는 데서도 피바람이 불었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60년대 말 민족보위상이었던 항일투사 김창봉은 군벌관료주의 죄목으로, 인민군 총 정치국장 허봉학은 당의 유일적 영도체제 확립에 저해를 준 ‘반당반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했습니다. 이를 통해 김일성은 군부를 완전 장악하게 된 겁니다.  

3. 김일성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숙청이 끊이지 않았다는 말씀인데요. 김일성이 1인 지배체계를 구축하기까지 이런 과정이 지속됐다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유일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당의 노선과 정책’이란 명분을 내놓고 그에 이반되는 움직임이나 목소리가 제기되면 바로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몰아 처형하곤 했었습니다.

여기서만 그친 게 아닙니다. 바로 주민들을 세뇌시키는 우상화 작업도 병행했는데요.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반부터는 자기 가문은 ‘대대로 내려온 혁명적 가정’이라며 전국에 ‘혁명역사연구실’을 세우는 작업을 진행한 겁니다. 

이에 따라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전통역사가 서술된 책자는 모두 회수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의 ‘항일투쟁’과 ‘새 사회건설’과정이 서술된 도서만 우리의 ‘혁명역사’라면서 새로 출판하게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것이죠.

여기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북한 당국은 당시 3·1운동을 광복열망에 들뜬 비조직적인 인민봉기로, ‘탁월한 (김일성과 같은) 수령의 영도’를 받지 못한 탓에 실패한 교훈적인 봉기로 낙인찍었던 겁니다. 김일성 ‘혁명역사’가 아니라면 모두 다 배척하는 정책을 강화한 것입니다.  

4. 김일성이 무자비한 ‘숙청 정치’를 단행하면서 ‘유일지배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김일성이 내세운 또 다른 명분은 무엇이었나요?

김일성은 간부들을 상대로 ‘혁명과 건설에서 수령의 지위와 역할론’을 강조했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행위에 대해 ‘수정주의’라고 하면서 숙청을 진행한 것이죠.

또한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다시피 김일성은 자신만의 ‘사상이론’과 ‘주의주장’를 내세워 주민들을 세뇌시키거나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1962년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자주’ ‘국방에서 자위’ ‘경제에서 자립’ 방침과 4대군사노선이라 불리는 ‘전민무장화’ ‘전국요새화’ ‘전군현대화’ ‘전군간부화’ 노선을 내놓고 1인 독재체제를 가속화 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간부들 사이에서는 자립적 민족경제만을 주장하면 외부(외국)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불만이 표출되자 적잖은 간부들과 인재들을 ‘말 반동’이란 이유로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감금했습니다. 

이처럼 간부들이 다른 나라와 관계 개선을 이야기 하면 ‘사대주의’자로, 남의 것을 모방하면 ‘교조주의’자로, 능력 발휘를 안 하면 ‘패배주의’ ‘투항주의’자라고 지적하면서, 피의 숙청을 강행한 겁니다. 정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였습니다. 
   
5. 이러한 숙청 정치가 당시 김일성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습니까?

김일성의 독단적인 횡포는 자신의 정치 기반을 다지고 당과 국가의 최고 권력과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 일정한 효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김일성은 끊임없는 숙청바람을 일으켜 자신의 입지를 더 굳히려고 했고, 이를 뒷받침해준 사람이 바로 김정일입니다. 

김정일은 70년대 초 ‘수령(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등극한 후 1972년 2월 19일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 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에서 나서는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의 노작을 통해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주체를 확립하기 위한 움직임에 들어갑니다.

특히 1974년 4월 14일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을 발표했는데요. 이를 통해 ‘김일성주의‘ 유일독재체제를 꾀한 것이죠. 이것이 오늘날 간부들과 주민들이 아직도 강요당하고 있는 ‘주 및 분기생활총화’라 일컬어지는 자아비판의 시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6. 김일성은 북한 주민들에게 ‘어버이’와 같은 모습으로 기억되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무자비한 숙청 정치를 단행했음에도 불구, 주민들에겐 인민애를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김일성은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숙청바람을 일으키면서도 주민들에게 자신의 ‘위대성’을 강조하고 ‘인민의 수령’으로의 입지를 부각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체사상’ 즉,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서 인민대중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이론으로 주민들을 현혹시키거나 신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주민들이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죠.

하지만 모두 문제점이 있습니다. 일단 ‘주체사상’은 고(故)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집필한 정치이론이고, 한때 풍요했던 인민경제는 사실 소련과 중국의 물질적, 금전적 지원에 따른 일시적인 효과였습니다. 아직도 북한 주민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고 북한 당국은 이를 철저히 은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면, 당시 강선제강소를 찾아간 김일성은 다 무너진 용광로 앞에서 노동자들을 향해 “1만 톤의 철강재만 더 있으면 나라가 허리를 펴겠다”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 정도로 나라 형편이 말이 아니었죠.

그러다가 1960년대 초 갑자기 소련으로부터 30만 톤의 철강재를 차관 받았고, 중국정부에서 수천만의 현금지원을 받는 뜻밖의 원조를 받게 됐습니다. 한마디로 김일성이 정책을 잘 편 게 아니고요, 갑작스런 횡재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7. 김일성의 숙청 정치 역사를 보면 오늘날 김정은의 공포 정치를 떠올리게 됩니다. 김일성과 김정은의 통치 방식이 갖고 있는 유사점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해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할아버지 김일성의 숙청정치에서 업그레이드된 잔혹한 ‘현대판 공포정치’라고 판단됩니다.

김일성 집권시기에는 최용건, 김일, 최현, 오백룡 등 빨치산 출신 ‘동지’들의 중추적 역할로 1인 독재체제가 순조롭게 구축될 수 있었지만, 김정은은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다 보니 조급성과 폭력성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판단입니다.
 
때문에 고모부 장성택도 희생물로 전락했고, 최근엔 이복형(김정남)까지 무참히 살해하는 참극을 벌이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8. 김정은의 공포 정치가 김일성의 숙청 정치 이상의 잔혹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하시는 것이군요. 김일성과 김정은의 통치 방식의 차이점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김일성은 노련하게 공포와 포용을 잘 융합해 나갔다면 김정은은 무지막지하게 처형을 강행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즉흥적이며 감정적인 통치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이유 말고 김정은은 약점이 더 많습니다. 이렇다 할 업적도 없는데다가 생모 (고영희)의 떳떳치 못한 출신성분도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때문에 쩍하면 화를 내는가 하면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으로 주변사람들을 당황케 만들곤 하는 겁니다. 

9. 과도한 공포정치로 체제가 불안정해지자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을 모방한 이미지 정치까지 펼치며 인민애 선전에 나서기도 합니다. 공포정치와 인민애 선전을 병행하겠다는 김정은의 전략이 과연 주민들에게 통할 것이라 보십니까?

역대 독재자들은 바로 측근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도 순진한 인민들에겐 상냥한 이미지를 연출해왔습니다.

한마디로 ‘충신도 곁에 있고 배신도 곁에 있다’는 김정일의 가르침에 극단적 행동을 하면서도 ‘어린이는 나라의 왕’이라면서 선물 정치를 펼쳐왔던 김일성의 이미지도 따라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는 ‘자애로운 지도자의 풍모’를 보여주기 위한 양면 술책이고, 주민들도 이제는 그 실체를 차츰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한두 해도 아닌 수십 년 간 김 씨 가문의 통치하에서 살아온 주민들 사이에서 ‘그 아비에 그 아들’ ‘아비보다 더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겁니다. 특히 피의 숙청을 지켜본 주민들은 ‘아버지(김정일)보다 몇 배나 더 독한 놈’이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10. 일각에선 김정은의 공포정치가 그의 공격적인 성향이나 불안정한 통치 환경 때문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니, 북한에서의 공포정치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으면서부터 이미 예견됐던 게 아닌가 싶은데요. 올해로 사망한 지 23년이 된 김일성이 손자 김정은의 통치 모습을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이렇게 훌륭하게 독재를 구축한 모습을 보면서 일단 좋아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화를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기 사위이자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죽이기도 하고, 자기가 애써 키웠던 고위 간부들을 고사기관총으로 처형하는 안하무인 행태를 보면서 마냥 기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구축했던 숙청정치를 손자가 더욱 악랄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반성하고 김정은을 한바탕 꾸짖어 준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