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트로트 몰래 부르던 北여가수, 성공적 南정착 비결은?

“북한 출신은 하나의 ‘히든카드’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게 어필하거나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을 때도 이 부분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죠. 탈북민이라는 것을 숨기지 말고 당당하게 표현할 때, 비로소 히든카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006년 북한예술단 출신으로 구성된 여성 그룹 ‘달래음악단’의 리더로 데뷔해 노래 ‘멋쟁이’로 주목을 받았던 한옥정(39·사진) 씨는 한국에서 10여 년간 가수로 활동하면서, 북한 출신이 단점으로 작용했던 적은 없었다고 했다. 

한 씨는 오히려 ‘최초 탈북가수’라는 수식어로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또한 국내뿐 아니라 세계 유명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었다.

그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한국사회에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북한 출신이라는 점을 자신 있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 결코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은 점이 긍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북한 출신이라는 것은 모든 탈북민들의 ‘히든카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탈북민들은 대부분 탈북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해요. 스스로 탈북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한 모습을 보일 텐데 그런 점이 안타까워요.”

南트로트 몰래 듣던 北여가수, 한국서 꿈의 무대 올라

한 씨는 6살 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 탈북하기 전까지 예술 선전대에서 가수와 MC로 활동했다. 노래는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만 철저히 당의 선전을 추구하는 북한 노래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래서 신나고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미로’ ‘홍도야 울지마라’ 등 한국의 트로트가요를 몰래 불렀다. 

그러다 한 씨는 탈북과정에서 중국TV에 나오는 ‘KBS 가요무대’를 보고 출연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된다. 그는 탈북민 사회정착지원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후, 무작정 KBS 방송국을 찾아갔다. 이후 몇 차례의 오디션을 본 끝에 정식가수로 데뷔했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가요무대에도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최초 탈북가수로 화려하게 무대에 섰지만, 처음에는 확연히 다른 남북한의 공연문화 때문에 혼란을 겪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가수 혼자 노래를 부르고, 관객들은 점잖게 앉아 관람만 했는데, 한국에 와보니 무대 위 가수와 관객들이 하나 되어 공연을 즐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씨는 남북 문화 차이를 적잖게 느꼈지만, 그 차이를 인정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눈치를 보거나 무작정 숨지도 않았다.

“가수가 되는 과정에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진 않았어요. 방송에 나가서도 기죽지 않고 모르면 당당하게 물어보는 스타일이거든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이야기를 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아는 척하는 것만큼 어색한 게 없죠.”

가수 외에도 여러 활동 병행…“마이크는 끝까지 잡고 싶다”

그는 현재 가수활동을 비롯해 초·중·고·대학교와 공무원 연수원 등에서 안보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탈북민 최초로 한국 소방 복지재단의 홍보위원장과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민들의 모임에서도 홍보부장을 맡고 있다.

한 씨의 이러한 활동은 얼마 전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대한민국 평화·안보대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는 결실을 맺었다. 그는 “한국에 정착한 지 10년이 됐다. 다양한 활동으로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지만, 항상 (저를) 찾아주시는 덕분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삶을 다할 때까지 마이크를 잡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항상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통해 하고 싶은 노래를 부르고, 하고 싶은 말을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한옥정 씨와의 인터뷰 전문]

-언론이나 TV에 이전만큼 얼굴을 많이 비추는 것 같지 않다. 요즘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초·중·고등학교, 대학교와 공무원 연수원에서 안보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본업이 가수다보니까 행사도 다니고 있다. 그리고 현재 탈북민 최초로 한국 소방 복지재단 홍보위원장도 맡고 있고,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민들의 모임에서 홍보부장 등 여러 활동을 하다보니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북한 예술 선전대 출신으로, 가수와 MC로 활동했다고 알고 있다. 우선 예술 선전대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한국에서 가수는 노래하고 싶은 장르를 마음껏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북한 예술은 그게 아니다. 예술은 어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야인데, 북한에서는 철저하게 당의 목소리를 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술 선전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김정은이 15장의 연설을 한다면, 선전대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노래와 춤, 만담 등의 작품을 만든다. 긴 연설일지라도 이를 노래나 공연으로 재밌게 풀어내면 주민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북한은 선전선동을 중요하게 여긴다. 예전에 김정일은 “하나의 총알은 하나의 심장을 뚫지만, 한 가락의 노래는 천만심장을 움직인다”고 했다. 예술이 정치적으로도 중요하다는 의미다.  -예술작품은 배우나 가수들이 직접 만드나?

예술 선전대에 작가, 작곡가, 연출가 등이 다 있다. 예술단에서 작품을 제작해 당 조직의 사인을 받으면, 배우나 가수들이 각 지방단체들이나 기업소, 군대 등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예술단은 무대 위에서 김 부자의 경축공연이나 기념일 행사에도 동원되고, 지방에 있는 기업소에도 내려가 예술선전활동을 한다.

-예술 선전대에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6살 때부터 음악을 시작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는 당 조직의 신임을 받는 당중앙위원회 5과에 뽑혀 6개월에 한 번씩 당의 부름을 받았었다. 5과에서는 몸무게와 키, 골격 치수 등의 사항을 졸업할 때까지 꾸준하게 체크한 다음, 졸업을 하면 그때 뽑아가는 것이다. 출신성분도 매우 중요했는데, 성분이 좋지 못해서 항상 성적이 나빴다. 아버지가 광산노동자였던 탓에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예술 선전대를 찾아가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했으니 선전대에 뽑아달라고 당돌하게 요청했다.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선전대 대장의 테스트를 거쳐 운 좋게 합격하게 됐다.

-북한에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술 급수’라는 것을 준다고 들었다. 받은 적이 있었나?

예술 급수 6급을 받았었다. 예술 급수는 공무원 급수랑 비슷한데 1, 2년에 한 번씩 예술인들을 대상으로 1~6급까지 급수 시험을 친다. 성악이나 기악 등 본인이 잘하는 분야의 능력과 연차, 실기·필기시험 점수 등을 통합해서 잘하면 한 급수씩 올리는 것이다. 다만 예술 선전대 대장이 4급을 받을 정도였고, 1급은 주로 북한에서 1등 예술단인 인민 예술단이 받는다. 이처럼 급수를 받는 일은 쉽지 않다.

-북한에서 급여는 잘 나왔나?

북한에는 유해노동, 무해노동, 중노동, 경노동 등이 있다. 그에 따라 월급도 달라진다. 한국에서 가수들은 대체로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지만, 북한에는 그러한 개념이 없다. 북한 가수는 무해노동, 경노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 노동자보다도 월급이 적다. 예를 들면 일반 노동자 월급이 80~90원이라고 하면 선전대 월급은 70원 정도다. 또한 월급도 예술 급수대로 받는다. 6급은 제일 밑이라서 더 적게 받는다. 그때 당시 월급 70원을 받았는데, 70원으로는 당시 쌀 1kg(120원)도 못 샀다. 정말 많이 받아야 쌀 1kg를 간신히 살 수 있는데, 그것도 온전히 받지는 못했다. 

-가수들도 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건가?

월급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장사를 하는 연예인들도 많다. 그럼에도 여자들에게는 좋은 직업에 꼽힌다. 항상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구두를 신고 다니다보면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을 잘 갈 수도 있는 여건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 선전대는 우선 국가에서 검증된 사람이기 때문에 간부나 고위층에게 시집을 가는 일도 많다.

-북한에서도 가수들은 여러 노래를 많이 듣지 않나. 한국이나 외부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나?

많이 들었다. 선전대는 항상 가곡이나 클래식위주의 고운 목소리를 내야했는데, 사실 북한에서부터 한국의 트로트가 목소리에 잘 맞았다. 북한 노래는 식상하기도 하고 잘 맞지 않아서 한때는 노래 부르는 것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방황을 하기도 했었다.

-한국 트로트 중에 어떤 노래를 가장 좋아했나?

‘사랑의 미로’ ‘홍도야 울지마라’ 등의 가요를 좋아했다. 목소리가 나오는 대로 부를 수가 있어서 편했다. 근데 그 노래들을 부르면 선전선동의 목적이 사라지는 것이어서 쉽게 부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부를 때가 있었다. 북한에도 ‘놀새족’이라고 하는 부류가 있었는데 트로트는 그런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휴가철에 천렵(계곡을 따라 캠핑 가는 것)을 가서 친한 언니·오빠들과 신나게 한국 노래를 부르면서 노는 게 낙이었다.

-한국에 와서도 가수를 한 이유는 뭔가?

북한에서 어릴 때부터 노래를 하다 보니 잘 할 수 있는 게 노래뿐이었다. 또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탈북할 때 중국TV에서 우연히 KBS가요무대를 접했는데, 그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래서 한국에 입국해 KBS방송국에 찾아갔다. 당시 북한 억양을 그대로 쓰던 나에게 방송국 내에 있는 시청자 상담실의 한 직원은 가수협회를 찾아가 보라고 권유했다. 처음에는 소속사 없이 프리랜서로 활동을 했는데, 무대에서 공연을 몇 차례 하다가 한 소속사에 스카우트가 됐고 가수로 방송데뷔까지 하게 됐다.

-남북한의 노래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정서뿐 아니라 창법도 다르다고 알고 있다. 본인이 느끼기에 어떤 차이가 있나?

우선 사람들의 정서에서 굉장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공연을 할 때는 관객하고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한국에서는 공연을 볼 때 박수를 치는 등의 반응을 보이는 게 매너인데, 그에 비해 북한 공연은 무대는 무대, 가수는 가수대로 각자 논다. 아무리 멋있는 공연도 점잖게 보는 것이 그 나라 사람들의 정서고 매너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무대에서 혼자 놀고 즐기고 들어오는 것보다는 함께 땀 흘리며 즐기는 느낌이 좋은 것 같다.

창법도 다르다. 북한에서는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어색하고 개성이 느껴지지 않아 재미를 못 느꼈던 것 같다. 가끔 특별하게 목소리 좋은 가수가 한 명씩 있긴 한데, 목소리가 좋아도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면 창법이 같아서 별다를 게 없다. 북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싫다고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든 것 같다. 한국에서 나도 모르게 북한과 남한 창법을 섞어 노래를 부르게 됐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이제는 두 창법을 전부 놓치기 싫다. 북한 노래를 부르는 곳에 가서는 북한 노래를 부르고, 남한 노래 부르는 곳에 가서는 남한 노래를 부르면 되지 않나. 남한 출신 사람들도 북한 말을 흉내 내는데 굳이 북한 창법이나 사투리를 버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 출신이라는 것은 모든 탈북민들의 ‘히든카드’가 될 수 있다. 한국에 와서 가수로 데뷔했을 때,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도 수월하게 어필할 수 있었고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을 때도 북한 출신이라는 것은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이처럼 탈북민이라는 것을 숨기지 말고 당당하게 표현할 때, 비로소 히든카드가 될 것이다. 그런데 탈북민들은 대부분 탈북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한다. 스스로 탈북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한 모습을 보일 텐데, 그런 점이 안타깝다.

-한국에 와서 가수로 무대에 서기까지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가수가 되는 과정에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딱히 힘들다고 할 건 없었다. 방송에 나가서도 기죽지 않고 모르면 당당하게 물어보는 스타일이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이야기를 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아는 척하는 것만큼 어색한 게 없다.

-‘최초 탈북 가수’라는 수식어 때문에 붙는 편견은 없었나?

좋았던 건 신선하다는 반응이었다. 최초의 북한출신 여성 그룹이라고 해서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주목을 받아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오히려 북한 출신이라는 것이 활동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됐고, 방송에서 어필하는 데도 수월했던 것 같다.

조금 아쉬운 것은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사건 등 북한의 도발사건이 발생하면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눈치가 보이고 죄송했다. 또 탈북민들과 관련해서 안 좋은 뉴스가 나오면 괜히 3만 명이 전부 같은 집단으로 비춰질까봐 속상하기도 했었다. 열심히 잘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언론에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여러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적이 있나?

한국에 와서 가수로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성공이라는 기준은 각자 다르다. 뒤돌아봤을 때 후회 안 하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성공한 거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제는 안보강사로서도 학생들을 교육할 때도 성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대한민국 평화·안보대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잘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길 바라나?

어떤 특별한 인식을 안 가졌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통일이 되면 자연스럽게 함경도, 평안도 등 여러 지역 사람들이 어울릴 것이다. 자유가 없이 사는 북한 주민들도 평범한 삶을 살고 있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마음이 필요할 것 같다.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거창한 꿈은 아니다. 삶을 다할 때까지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는 것이다. 마이크를 통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거나,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사람들한테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마이크를 놓는다는 건 생각해 본 적 없다.

-본인처럼 가수를 꿈꾸는 후배들도 많이 있을 것 같다. 조언을 해준다면?

진짜 이 일을 즐길 수 있는지, 이 길을 걸어가면서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마음가짐이 중요할 것 같다. 처음 가수가 됐을 때 외적인 모습 때문에 욕을 먹었고, 그래서 안티 팬도 꽤 있었다. 연예계에 종사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본인이 그렇지 않다면 나이가 어릴 때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