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땅 南서 ‘北도토리 송편’ 빚으며…

북한에 있었을 당시 가난했던 10대 시절엔 단 한 번이라도 떡을 실컷 먹었으면 하는 작은 소원이 있었다. 소나기에 질척해진 흙길을 걸을 때면 이것이 쌀 반죽이면 떡을 빚어 실컷 먹을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할 정도였다. 

당시 북한은 추석 때가 돌아오면 제사상에 올릴 송편을 만들어야 한다는 풍습이 있었다. 대다수의 친구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송편을 그리며 좋아라했지만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었다. 황해도에 외가 조상 묘가 있었지만 여행증발급이 힘들다는 이유로 성묘를 갈 수 없었고, 송편 준비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1980년대 말 여느 북한 아이들처럼 필자도 당국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님만 원망했었다. 다만 딸의 마음을 아셨는지 직장 일에 늘 바쁘셨던 어머니는 어느 해인가 잠시 짬을 내서 40리(약 16km) 떨어진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오셨다. 도토리를 삶아 절구에 찧어 쓴 물을 몇 번 우려 낸 다음 사카린을 넣으면 멋들어진(?) 송편 속이 됐다.
 
쌀이 귀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쌀 반죽을 최대한 얇게 만들어 그 속에 큼직한 도토리 속을 넣어 송편을 빚으셨다. 추석날에 동네아이들과 함께 모여 놀 때 큼직한 도토리 송편을 들고 으스대던 기억이 새롭다. 이때만큼은 추석날 해가 빨리 떨어지는 것 같아 더 아쉽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흘러 가정을 이루고 도토리 송편으로 어머니의 추석 제사상을 차렸다. 그러면서 북한 당국의 억압과 통제,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고를 묵묵히 견뎌내면서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도토리 송편을 만들어 주신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겼다.

이제는 자유의 땅 한국 서울에서 추석 제사상을 차린다. 대체로 음식과 과일은 구입하지만 도토리 송편만은 직접 손으로 빚어보며 당시의 마음을 되새긴다. 탈북자로서 어떤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지, 북한에서는 가난하게 살았던 어제의 10대 소녀는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번 추석에도 도토리 송편을 위해 산을 누비고 있을 북한 땅의 어머니들에게도 풍성한 한가위의 보름달이 비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해 본다. 통일 한반도에서는 더욱 더 커질 통일 송편을 빚으며 북한 주민들도 함께 웃는 그 날이 얼른 오기를 바란다.

북한 경제 IT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