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中 교훈삼아 주민행복위해 개혁개방 나서야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한 이후에 30여 년 동안 사회주의 기치를 내걸었었습니다. 결과 3천8백만 명의 인민들이 굶어 죽는 대참사를 겪기도 했습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끌끌한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이 타도되거나 죽는 아픔을 겪었으며, 젊음과 열정을 쏟아부어야할 청년들은 권력투쟁의 광풍 속에서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결국 중국 경제는 20년이나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사회주의 노선의 한계와 좌경적 권력투쟁의 폐해를 뼛속 깊이 체험한 중국인민들은 모택동이 죽은 이후에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중국공산당은 1978년 11월, 11기 3차 회의 이후, 농업과 공업, 국방과 과학기술 등 네 개 분야의 현대화노선을 추진했습니다. 국가운영의 중심을 계급투쟁이 아니라 경제발전에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국의 개혁은 농업분야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인민공사를 폐지하고 집단적 생산방식을 농가책임제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이 초과 생산한 농산물은 제 맘대로 사고 팔수 있도록 바꿨습니다. 일한 만큼 생산량이 늘어나고, 생산량이 늘어난 만큼 이득이 생기자, 농민들은 적극적으로 농사에 달라붙었으며, 결국 농촌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공업 분야에서도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개인이 경영하는 기업과 노동자들의 자주권을 확대했습니다. 기업과 노동자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책임제를 도입하고, 성과가 좋은 기업이나 열심히 일한 노동자에게는 더 많은 이득이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점진적으로 도입해서 계획경제의 약점을 보완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 바꿔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기업과 노동자들의 적극성은 눈에 띄게 높아졌으며, 공업 생산력 역시 비약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가하면 대외적인 개방도 적극 추진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 광둥성 심천, 주해, 싼두 그리고 복건성의 하문 등 네 개의 경제특구를 설치했으며, 1984년에는 대련과 천진, 청도와 상해 등 14개 도시를 추가로 개방했습니다. 1988년에는 해남도, 1989년에는 상해 푸동 경제구역을 대규모 경제개발구역으로 지정해 개방했습니다. 4개의 경제특구와 14개 개방도시 등 대규모 경제개발구역은 세계의 자본과 인력 그리고 기술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중국 경제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전진기지가 됐습니다.

이렇게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평균 10%에 가까운 높은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뤄냈으며, 그 결과 수천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에서 허덕이던 가난한 나라에서 지금은 미국에 이은 세계 두 번째 경제대국으로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이제 북한도 중국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개혁과 개방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2천5백만 북한인민의 행복과 미래를 위한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