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 가족과 재상봉 원했던 北 이산가족 끝내 좌절

북한 평안남도 ○○군에서 살고 있는 김 씨(68세)와 서 씨(46세)는 남한에 살고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고 국경지대로 상경했다. 이들은 각각 본인과 아버지가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통해 남측 가족들을 한 차례 만났던 터였다.

월북자 출신인 김 씨는 고령의 몸을 끌고 죽기 전에 한 번 더 남한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더 만나보고, 그 동안 살아온 과거에 대해 진실을 알리고 싶어 했다. 김 씨는 아내도 월북자 출신이어서 북측에 가족형제들이 없다고 했다.

김 씨는 평안남도에서 북.중 국경지대까지 먼 길을 어렵게 왔다. 보위부의 감시가 두려웠지만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측 가족들을 만나야겠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내와 함께 먼 길을 나섰던 것. 그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남한의 가족들과의 만남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남한에 가족이 있는 지인을 통해 서울시 양천구에 거주하는 심모 씨에게 가족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심 씨가 데일리NK에 이산가족을 찾는 일을 도와달라고 요구해왔고, 본지는 심 씨와 동행 취재를 시작했다.

김 씨는 심 씨와의 통화에서 “지난 ○○년 ○월 이산가족 상봉 때 남조선에 살고 있는 형님을 만나 보았으나, 보위부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 내가 처한 사실을 한마디도 알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산가족 상봉에 나오기 전에 남조선에 있는 형제들을 만나면 어떻게 말하라고 훈련을 준다”며 “나도 ‘모란봉 호텔’에서 한 달 동안 가족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답하라는 강습(실습)을 받고 말하는 훈련을 했다”고 털어놨다.

이와 함께, 남한에 살고 있는 삼촌을 만나기 위해 국경지역으로 상경한 서 씨는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드리기 위해서였다. 서 씨의 아버지도 지난 이산가족 상봉에서 남한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만난 경험이 있었다.

서 씨의 경우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남한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 서 씨의 아버지도 이산가족 상봉에서 남한에 살고 있는 형님과 가족들을 만났었지만, 북한 보위부의 감시로 인해 어려운 처지를 알릴 수 없었다.

“모란봉호텔서 한 달 동안 강습 받고 훈련 받아”

서 씨는 전화 통화에서 “지금 우리 가족들은 모두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삼촌이 남조선에서 잘 산다고 하는데 아버지를 조금만이라도 좀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서 씨는 잦은 정전으로 기차조차 제대로 다니지 않는 악조건에서 증명서도 없이 어렵게 국경지대까지 왔다. 지난해 여름 수해로 농사가 망하고 국가적인 식량배급도 없어 가족들이 아사직전이라고 털어놨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심 씨는 이산가족 상봉을 주관하는 ‘대한적십자사’ 등을 통해 남한 가족들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남측 가족들은 예상과 달리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 씨의 남측 가족들의 경우 “믿을 수가 없다”며 북측 가족들과의 전화통화 자체를 거부했다.

김 씨와 그의 아내는 남쪽 가족들이 만나기를 거절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죽기 전에 속 시원히 모든 것을 터놓고 싶다. 한 번만 통화하게 해 달라”고 재차 간청했다.

김 씨는 전화통화에서 “내가 남쪽에 있는 형님에게 죄를 지은 일도 없고 피해를 준 것도 없는데 전화조차 받지 않겠다는 게 무슨 말이냐”며 “정말 나의 가족들을 찾긴 찾았냐? 그러지 말고 좀 제일처럼 도와 달라”고 안타깝게 호소했다.

이에 심 씨는 남측 가족들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 다시 만나볼 것을 권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북측 가족을 사칭해 사기를 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수차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직접 전화통화를 해볼 것을 설득했으나 가족들은 끝까지 거부했다.

남측의 형제들이 만남을 거부한다는 소식을 들은 김 씨의 아내는 끝내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고 한다.

남한에 살고 있는 서 씨의 형제들과도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서 씨의 남측 가족들도 직접 동생이 오지 않고 아들(조카)이 왔다는 말에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북측 가족들에 대한 상세한 상황과 이름들까지 설명해줬지만 만나기를 거부했다.

지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북측에 살고 있는 오빠(서 씨 아버지)를 만났다는 여동생 서선애(가명)씨는 “이미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만났고 다시 만나고 싶으면 또 신청해서 만나도 되겠는데, 왜 하필 비공식적 채널을 통해 만나야 하는가?”라고 의아해했다.

서 씨의 남한 가족들에게 북한의 교통조건에서 고령인 서 씨의 아버지가 직접 오기에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설명해줬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산상봉 당시 잘 살고 있다 했다…안 만날 것”

서 씨의 남한 가족들은 “이산가족 상봉 때 만나서 다 들었다. 나는 그들이 다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서 씨의 남한 가족들은 “북한에 살고 있는 형제가 어렵게 살고 있다면 충분히 도와줄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이산가족상봉 당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출세해서 잘살고 있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서 씨의 가족들도 역시 마지막 전화통화에서 북측의 조카가 만나겠다는 청을 끝내 거절했다.

이에 따라 지난 12월 약 보름 동안 남한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한 지인의 집에서 숨어 지냈던 김 씨와 서 씨는 끝내 남한에 살고 있는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좌절한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학수고대하며 남한에서의 소식을 기다렸던 김 씨는 마지막 전화통화에서 체념한 듯 “잘 살라고 하세요, 잘 살라고 하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하다 끝내 오열하고야 말았다.

서 씨에게는 ‘이산가족 상봉 때 좀 도움을 받지 않았느냐? 이제 다시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만날 수 있으니 그때까지 기다려라’는 남한의 가족들 말을 전했다.

이에 서 씨는 “이산가족상봉에서 우리가 도대체 무슨 도움을 받았는데?”라고 다소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내 “(이산상봉을 통해) 만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 한다”며 만남을 포기한 듯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