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실제 반대’ 중국환상과 우리의 대북정책 실패

I. 세 가지 환상

지난 20여 년간의 한국의 대북정책 실패사를 돌이켜 보면 그 원인은 3가지 환상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남북 간의 정치체제의 차이, 5년 단임과 같은 제약조건을 무시한 대통령 개인의 장밋빛 대북환상, 다음에는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실제로’ 반대하고 있다는 중국환상, 마지막으로 통일이 남북 간의 교류 증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능주의 환상이 그것이다.

한국의 정치가, 중국전문가, 북한전문가 그리고 언론 중 상당수는 앞의 세 가지 환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 역시 임기 말이 되어서야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以北制南(이북제남)’, ‘以北制美(이북제미)’에 있다는 사실, 북한의 전체주의 정권과는 신뢰관계 형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한미의 사드 배치 결정 의도가 중국 견제에 있고, 북한의 제5차 핵실험의 원인이 한미의 대북 군사위협에 있다’는 중국의 일방적 주장은 이들이 더 넓은 세계전략하에 ‘북핵공정’을 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의구심의 핵심은 북핵이 북한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북한의 합작품이라는 판단이다. 지금까지 미국과 한국의 북한전문가, 외교관 및 지도자들은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반대하며 북한정권의 안하무인 행태에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말을 믿고, 북한정권의 붕괴, 난민의 대량 중국유입이 북한의 핵개발・도발보다 중국의 이익에 더 큰 위협이라는 점을 인정하여 왔다. 특히 한국과 미국의 정치가, 외교관, 학자들은 수많은 사적 대화에서 중국인과 중국정부의 북핵문제에 대한 진정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으로 인해, 중국의 대 한반도 정책의 명목과 실제가 일치할 것이라는 중국 망상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이번에 미국의 싱크탱크인 미외교관계위원회(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는 전 해군제도 마이크 멀린(Mike Mullen)과 전 상원의원인 샘 넌(Sam Nunn)의 공동연구로 「북한에 대한 더 날카로운 선택: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중국의 포용(A Sharper Choice on North Korea: Engaging China for a Stable Northeast Asia)」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저자들은 미국의 다음 정권에게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4가지 제안을 하였다. (1) 회담을 통해 북핵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며, 중국의 적극적 참여를 위해 주한미군의 위상도 논의의 대상에 포함, (2) 북한과 평화협정을 통해 정전협정을 대신하여 북핵을 동결, (3) 유엔을 통한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강화, (4) 미국-한국-일본의 군사협력을 강화하여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처 등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CFR의 제안 중 앞의 세 개는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에 실제로 반대하고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만일 중국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북한의 핵개발 저지가 아니라, 북핵을 통해 한미동맹 와해 내지는 한반도에서 미군의 철수에 있다면, 위의 제안은 시간낭비는 물론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망가뜨리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이런 오류는 개인이건 집단이건 국가이건 그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말과 함께 행동을, 그리고 행동에 대한 이유와 함께 그 결과를 보아야 한다는 인간사회의 기초상식을 무시하여 왔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은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용인하기에는 세계화된 지구촌에 중국이 이미 매우 깊숙하게 동화되어 왔다고 믿어 왔다. 실제로 지난 30년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제창하는 자유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비록 국내 빈부격차가 극심해졌지만 6억 명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중국은 세계화로부터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고 믿는 선진 국가들이 보호무역으로 돌아설 것에 대비하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실크로드 경제벨트 및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세계은행 보다 많은 개발원조, 중국시장을 이용한 서방국가들의 개별적 조련(調練) 등을 통하여 중국 주도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구축하여 왔다. 그것이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제안한 ‘일대일로(一带: 실크로드경제벨트, 一路: 해상실크로드길)’이다. 국제법을 완전히 무시한 패권주의적 남지나해(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이 지역에 핵잠수함을 파견하였다.

중국 주도하의 ‘一带一路’ 구축 시도와 미국의 ‘아시아중심전략(pivot to asia)’이라는 두 거대 지각판은 거시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국지적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전 지구적 관점에서 부의 창출 지역은 한국과 일본을 포함하여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등의 개발도상국으로 이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지각판 충돌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지진의 형태로 나타날 곳은 남지나해와 한반도이다. 따라서 북한의 핵개발과 핵위협이 중국의 전략적 이익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는 어떤 대북정책, 어떤 북핵문제 해결제안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특히 이번 CFR의 제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국은 북핵 동결이라는 방편적, 과도기적 해결을 위해서라도 주한미군의 미래(disposition of U.S. forces)를 의제에 포함시킬 것에 동의할 수 있다. 북핵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국은 1세기 전인 1905년 미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 간의 영역 분할의 기초가 된 가쓰라-태프트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II. 미국의 핵우산과 헬무트 슈미트의 나토 이중전략

지금 북한이 한국을 겨냥할 수 있는 핵미사일을 갖고 있다고 본다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재래식 전력이 아니라 미국의 핵우산 정책이다. 북한이 수십 차례 미사일을 발사하고 히로시마급 핵실험을 하더라도, 또한 김정은이 한국과 미국에 핵전쟁을 선포하더라도 추석 연휴에 100만명 이상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전쟁이 안 날 것이라는 한국 국민의 믿음 때문이다. 그것은 북한이 핵 공격을 할 경우 미국의 핵 보복에 의해 북한도 궤멸할 것이라는 점을 북한도 알고 있기에 전면 핵전쟁은 없을 것이며, 북한이 재래식으로 공격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을 북한의 최고존엄도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다.

미국은 동맹국이 핵 공격을 받을 경우 자국이 직접 공격 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보복한다는 핵우산 정책을 확약하고 또 확약하여 왔다. 그럼으로써 미국은 동맹국을 방어하고 동시에 동맹국 스스로 핵무기 보유를 추진하지 않도록 만들어왔다. 따라서 말로써 더 이상 미국의 약속을 받는다는 것은 신고립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지 않는 한 별 의미가 없다. 다른 한편 미국의 핵우산 정책은 (다행히도) 실제 전쟁에서 증명된 적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처럼 자체 핵무기가 없는 국가의 선택지는 적대국으로부터 핵 공격을 받을 경우 동맹국 미국이 핵우산 정책을 지킬 확률이 가장 높은 군사・정치 구조를 확보하거나, 독자 핵개발에 나서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이 점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서독과 유럽을 뒤흔들었던 나토의 이중전략(Doppelbeschluss)과 중거리핵미사일 퍼싱II(Pershing II) 배치의 배경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독일 사민당(SPD)의 국방전문가였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는 원래 유럽의 나토국가 내의 핵무기 배치를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소련의 선제공격 목표가 되기 때문이며, 같은 이유로 아데나워 수상이 시도했던 서독의 독자 핵무기 소유 역시 반대하였다. 그러나 슈미트 수상은 1977년 런던에서 ‘소련이 바르샤바조약 국가에 배치한 신형 중거리핵미사일 SS20이 유럽의 군사균형을 결정적으로 깨뜨렸다’는 연설을 함으로써 1979년 나토는 이중전략을 결의하였다. 그것은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SS20을 철거하도록 만들 수 없다면 4년 후인 1983년 말부터 미국은 신형 중거리핵미사일 퍼싱II를 나토국에 전면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퍼싱II의 배치를 놓고 당시 서독에서는 시민, 지식인과 학생 심지어 군인들도 참가한 거대한 평화운동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정확도가 극히 높아져 폭발력이 낮아진 퍼싱II는 적의 지휘부와 벙커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선제공격무기이며, 따라서 소련의 재래식 침공에도 나토가 핵전쟁을 먼저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use them or lose them) 이제는 확실히 뿌리내린 정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녹색당의 등장 역시 이 평화운동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나토의 이중전략은 고르바초프의 소련으로 하여금 군비경쟁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1987년 유럽에서 모든 중거리핵미사일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았다. 역사가 나토 이중전략의 정당성을 입증한 것이다.

슈미트 수상은 소련이 SS20으로 독일과 유럽을 침공할 경우 당시 나토 핵자산의 낙후성으로 인해 미국이 소련을 대륙간탄도탄(ICBM)이나 잠수함발사미사일로 보복해야 하지만, 이 경우 미소 양국이 공멸할 것이 분명하기에(상호확증파괴) 미국이 유럽 방어를 포기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로 슈미트의 이 ‘신뢰를 위한 불신’이 퍼싱II 배치의 배경이었다. 현실정치가 슈미트는 ‘비전을 갖고 있는 정치가는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할 만큼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였고, 미국은 그의 정당한 불신을 인정하여 유럽에서 전략핵무기간의 균형이 필요함을 인정하였다. 즉 슈미트는 적대진영과의 전쟁시에도 미국의 핵우산 정책이 지켜질 확률이 가장 높은 정치・군사구조를 만들어 핵전쟁 발발의 위험을 줄이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퍼싱II 배치는 군사적 조치라고 보이지만 실은 미국의 개입을 확보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