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에서는 그딴 식으로 조사받는가?”

▲89년 평양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북한대사관 차를 타고 베이징공항에 도착(자료사진)

전편으로 바로가기 공항 출입국관리소장이 나를 심문하는 동안 세관에서는 짐 보따리를 열어 심사를 진행했다. 세관에서 보따리를 열어보니 이것은 여행객의 짐이 아니라 장사꾼의 보따리 같은지라 어이 없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이거 누구의 부탁으로 가지고 왔느냐?” “장사하려고 사 왔느냐?”
공갈 반, 협박 반 조로 묻는다. 그렇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전부 선물용으로 사온 겁니다”라고 잡아뗐다.
“지난 시기 올 적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선물종류들입니다. 냉동 닭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는 사람들과 일요일 공원에 가서 구워먹으려고 별 생각 없이 값이 싸서 사온 것이니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배터리와 닭은 류지공(Fine Co.Inc.USA 북경지사장)씨가 처갓집에 전달해 주라는 물건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만일에 이런 물건을 전달하는 줄 알면 이것도 불법이다. 그리고 나만 불법이 아니라 받는 사람 측에도 불법이어서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지나가는 사람과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나라인데 이런 물건까지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것이 북한의 생활규칙이다.

공항에서 보통강 호텔로 옮겨가다

공항 안전부(보안서)에서도 ‘골치아픈 미 제국주의자가 하나 나타났다’고 머리를 흔든다. 직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이 조용히 나에게 일러준다. 지금 교포총국에 연락을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는 것이다.

김만수 해외동포원호위원회 부위원장에게도 연락을 했고, 교포 총국장은 무슨 행사에 참석하느라고 직접 연락이 안돼 김복신 부총리를 불렀다고 했다.

“부총리 동지에게까지 연락이 되었으니 잘 될 겁니다”라고 말한다.

공항당국에서는 처음 무비자 입국자가 생긴 것이라 건국 이래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여러 높은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장장 5시간여만에 부총리의 신변인수 확인 전화를 받고 풀려나 보통강 호텔로 갔다.

“고려호텔로 가지 않고 왜 보통강 호텔로 가느냐”고 묻자, 상부의 지시라고 했다. 호텔에 들어서니 단골 안내원인 김현철이 기다리고 있다가 기가 찬다는 듯이 씁쓸하게 웃는다. 조금 있으니 김영수 참사, 김남철 지도원이 찾아왔다.

“내일이면 아오지 탄광으로 갈 것이다. 꽁꽁 묶여 있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편안하게 있는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안내원이 정식으로 나에게 호텔 문 밖으로 절대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상부의 지시사항을 알려주었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방으로 안내해 주면서 현철이가 “내일 아침 일찍 7시경 보위부 직원이 조사하러 나온답니다. 피곤하시지만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방에 계십시오. 제가 자는 방 번호는 몇 번입니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고 했다. 그냥 넘어 가는 것이 아니군…

“남조선이나 미국에선 그딴식으로 조사받습니까”

이튿날 아침 7시 정각에 깡마르고 고약하게 생긴 눈빛이 마치 독사 같은 느낌을 주는 40대의 수사요원이 방으로 들어섰다. 찬바람이 느껴진다. 소파에 마주앉았다. 그는 담배를 한대 꺼내 입술 한쪽 끝으로 삐딱하게 건방지게 꼬나 물었다.

천정으로 연기를 뿜어 올리면서 조사가 시작됐다. 그느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야기 식으로 말하라”고 했다. 수사당국이 정보가 없을 때 흔히 쓰는 조사방식이다. 이왕에 이렇게 된 것 설마 나를 간첩으로 몰아 수용소로 보내겠나 싶어 조사에 응했다.

처음부터 오기가 생겨 느긋하게 마음먹고 출생한 본적지부터 오랜만에 추억을 회상하며 내 인생을 더듬기 시작했다. 태어난 시간과 장소부터 구구절절 읊어댔다.

“경상남도 진주시 봉래동 187번지에서 태어나 나보다 두 살 위인 누나와 같이 진주 중안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추운 겨울날 손발이 시려 누나에게 업고 가자고 떼를 써 업혀 갔다. 누나도 힘들겠지만 업혀가는 나도 떨어질 것 같고 너무 힘들어 ‘좀 잘 업어라!’ 했더니 ‘나도 손 시린데 잔소리 하모 팍! 놔 삐끼다’ 하면서 떨어뜨리는 시늉을 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갑자기 보위원이 불호령을 내린다.

“찬구 선생! 소설 씁니까? 기억도 좋습니다. 그런 이야기 듣잡니까? 그저 고향이 어디고, 어느 학교를 다녔고, 미국 이민은 왜 언제 갔고, 미국에서 무슨 직업을 가지고 살았으며, 우리 공화국에는 언제부터 무슨 일로 다니는 것인지에 대하여 말 하라는 거디! 뭐 학교 가다가 누나 등 물어뜯은 일까지 말하랍니까? 찬구 선생은 지금 조서 받고 있는 기야요! 내래 장난하잡니까?” 협박조로 따진다.

“반성하는 기미라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요?”

“어디 끌려가서 고생하면서 조사를 받아야 제대로 하겠습니까? 그래도 찬구 선생은 조국을 위하여 열심히 다니시기 때문에, 나쁜 짓 하려고 사증 없이 조국에 들어오지는 안 했을 테고, 그 경위는 알아야 하니 편안하게 조사를 하라고 특별히 상부지시를 받아 이렇게 나왔는데, 지금 선생의 조서 받는 태도는 뭡니까? 남조선이나 미국에서는 그딴식으로 조사를 받습니까? 철저하게 조사해야 갔습니다.”

나도 죄인 취급 받는 것이 기분 나빴다.

“그런 것이 아니고요, 출생부터 현재까지 말하라고 하니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방법뿐이지요. 그리고 남조선이나 미국에서는 이런 일을 해 본 일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또 한 대의 독한 담배로 긴 한숨을 쉬고, 아니꼬운 듯이 쳐다본다. 나는 나대로 아니꼽고 치사하고 기분이 나쁘다. 처음부터 죄인 취급하고 담배 꼬나 물고 기분 나쁜 인상으로 나를 대하니 나도 감정이 상했다.

“자! 다시 시작합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법 입국사유가 뭔지를 설득시켜줘야 하겠다’는 방향으로 말을 정리했다.

먼저 해외동포원호위원회의 김영수 참사가 캐나다 경유 팩스를 보낸 입국통지문 내용에 11월26일 입국하는데 차질 없도록 하라고 강조까지 해놔서 들어왔다고 말했다. 물론 억지소리다.

“방귀 뀐 사람이 성낸다더니, 찬구 선생이 그 짝 아닙니까”

다음에는 북경대사관에서 영사부장이 두 번이나 공화국 해외동포원호위원회로 사증 관계로 업무연락을 했다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4일이나 북경에서 하는 일 없이 무엇 때문에 호텔비만 쓰고 있을 겁니까? 화요일 사증이 안됐기 때문에 4일 동안을 북경에서 하는 일 없이 경비만 팔백 딸라 정도를 쓰고 있으란 말이냐고 따졌다.

미국에서 여기까지 오는데도 꼬박 6일이 소요되어 힘드는데 공화국의 잘못으로 또 내가 남의 나라에서 4일을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왜 되놈 나라에서 헛되게 돈을 씁니까? 조국에서 돈을 써야지요! 그래서 나는 하루라도 빨리 공화국에 와서 사업을 해야 한다는 그 생각만 하고 행동을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했다.

바로 옆집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아주 먼 공화국과 지구 반대쪽에 사는 곳에서 조국을 찾는 해외교포에게 시간과 경비는 생각하지 않고, 언제 오너라 일방적으로 마음대로 연락을 했으면 차질이 없도록 신경을 써서 해결 해줘야지, 내 탓으로만 돌리니 이거 어디 조국을 믿고 사업을 하겠냐고 했다.

다 듣고 있던 보위원이 이해가 간다면서도, 그래도 공화국이 하나의 국가인데 입국허가도 없이 들어 왔으니 이건 분명히 불법이고 위법이니 여기에 대한 조치는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좀 잘못했다는 마음이라도 보이라고 했다. 그래야 보고서를 잘 쓸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다시 둘이서 옥신각신했다.

“옛 말에 방귀 뀐 놈이 큰 소리 친다고 하더니, 지금 찬구 선생이 그 짝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할 말을 했는데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웬 담배는 그렇게도 많이 태우는지 방 안이 온통 담배연기로 꽉 찼다. 목이 따갑고 눈이 쓰리다. 문을 활짝 좀 열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게 한다. 보위원도 위에서 잘 봐주라고 해서 막상 나왔지만, 해결 실마리가 좀처럼 잡기 어려운 모양새다.

상황이 이 정도 되니 나도 오기가 앞서기 시작했다. 북한을 내 나라로 생각하고 편안히 다녔는데 나를 잡아넣으려면 넣어라. 이번 기회에 아오지 탄광으로 가든 어디로 가든 한번 가 보자! 미국시민이니까 우선 미국정부가 외교적으로 해결을 해 줄 것이고, 다음으로 한국정부가 알게 되면 미국과 연락하여 뒤처리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매스컴에서 “재미 사업가 한국계 미국인 L.A거주 김찬구. 비자 없이 북한에 입국, 평양공항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다시 아찔하다. 그러나 여기서 뒤로 물릴 수도 없다.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계속).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