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초 평양 무비자 입국사건”

89년 북한에 처음 입국할 당시 북경공항에서 고려항공 비행기에 오르기 전 모습(참고사진)

1991년 11월 평양에서 보내온 팩스 한 장을 받았다.

“11월 26일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사증(비자)을 발급해줄 테니 기한 내 평양을 방문하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사업방문 차 비자발급을 기다리던 터라 바로 평양 방문길에 올랐다. LA를 출발, 서울과 홍콩을 경유해 4일만에 일요일인 24일 북경에 도착했다.

다음날 25일은 월요일이었다. 늘 그랬듯이 양담배와 과자, 캔디를 넉넉히 사서 들고 북경 주재 조선 대사관에 비자받으러 갔다. 영사부장 한 선생이 반긴다. 하도 자주 다니니까 비자담당 영사 부장도 친하게 잘 알고 지내는 처지였다.

또 대사관에는 직원의 부인들이 정문에서 수위근무를 하거나 교대로 비자업무를 보고 있다. 대체로 외교관 부인들은 현지 대사관의 정상 업무를 돕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의 외교관 가족들은 직접 나서 업무를 보조한다. 단순한 도우미 역할이 아니라 정식으로 근무한다.

영사부장 한 선생이 “갑자기 웬일이냐”고 묻는다.
“공화국에 가려고 사증 받으러 왔다”고 하자, “가만히 있자. 사증 명령이 안 떨어졌던데? 오전 중 연락 명단에 없던데?”라며 “다시 잘 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찬구 선생은 내가 기억하는데 명단에 없었시오”라고 대답한다.
나는 “교포총국에서 내일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왔다”며 다시 살펴봐달라고 부탁했다.

한 선생은 오후 4시에 한번 더 연락이 오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한다. 비자를 발급받는데 단 한번도 차질이 없었으니 당연히 오후에는 연락이 올 것으로 생각했다. 영사 부장도 기다리기 지루한데 비행기표부터 사라고 한다.

비자없이 북한에 입국하다

북한 고려항공 비행기는 사증이 없으면 비행기 표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하도 자주 다니니까 으레 사증이 있는 줄 알고 사증 확인도 하지 않고 비행기표를 줬다. 왕복 일반석 260 달러다.

오후에도 평양외교부의 최종 연락이 없었다. 영사부장도 참 이상하다고 했다. 찬구 선생의 사증이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 미국에서 출발할 때 방문을 요청한 팩스를 챙겼기 때문에 영사부장에게 증거로 보여줬다. 대사관에서는 본국으로 연락을 하겠으니, 내일 아침 일찍 아예 비행기 탈 준비를 하고 대사관으로 나오라고 했다.

26일 화요일. 이날도 평양에서는 사증 발급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급해진 대사관에서 평양으로 전화를 하니 “아차, 실수로 명단에서 빠졌으니 오는 토요일에나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단다. 울화통이 터지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까지 4일 동안이나 북경에서 빈둥거리고 하루에 150 달러 비용을 들여가며 무엇 때문에 기다린단 말인가? 왜 중국에서 돈을 쓰나? 돈을 쓰려면 평양 가서 써야지. 비행기표도 있겠다. 일단 공항에 나갔다. 수속을 하다 안 되면 하는 수 없고… 자존심 상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실수로 명단에서 빼고 중국에서 대기하라고 하다니, 뭔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사에게 인사할 여유도 없이 공항으로 달려갔다. 수속하는 카운터에서도 사증이 없으면 수속이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수속하는 직원 역시 “아, 찬구 선생 또 조국에 가십니까? 자주 가십니다. 전번 달에도 가셨댔지요?” 하면서 으레 사증이 있을 것으로 믿고 수속을 해 줬다.

“안내동무, 사실은 비자 없이 들어왔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목이 말랐다. 뒤에서 직원이 비자 보자고 부를 것만 같았다. 갑자기 불안감에 현기증까지 생겼다. 무난히 비행기를 탔다. 혹시라도 뭐가 잘못돼 “찬구 선생! 좀 봅시다”고 할까 승무원의 눈도 피했다. 이윽고 비행기는 하늘 높이 올랐다. 이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단 평양으로 쳐들어 가야지!

평양까지 비행하는 한 시간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라 모르겠다! 저들이 오라고 해서 미국에서 6일이나 걸려 가는데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배짱이 생겼다. 이미 도착한 나를 내쫓겠나 하는 생각이었지만 머리는 복잡했다.

비행기는 무사히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VIP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일단 태연하게 대기실로 갔다. 교포총국에서 나온 사람이 있는지를 찾아봐도 그날따라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다른 때 같으면 한두 명 아는 사람이 꼭 있었는데? 서로들 반갑다고 인사를 하면서 입국수속을 하느라 분주한데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사람들은 거의 다 나가고 나만 남게 됐다. 마음이 급했다. VIP실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이 보기에도 내가 수상했던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나에게로 다가온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아무도 마중을 안 나왔습니까?”

입국수속 용지에 기록 할 것도 없다. 그저 종이만 들고 계속 앉아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수 밖에…
이젠 고백을 할 때다!

“어디서 왔습니까, 간첩 아닙니까”

“저, 안내 동무! 나 미국 동포인데요. 사실은 내가 사증 없이 왔습니다. 미안하지만 밖에 나가 교포총국에서 나온 사람 있으면 아무라도 좀 불러주십시오.”
“네!? 뭐랬습니까?”
“아, 내가 바빠서 사증 없이 그냥 왔다고요!”
“네? 사증 없이 어캐 비행기는 탔습니까?”
상황이 긴박해지는 분위기였다.

이 여직원은 나보다 더 놀래 급히 뛰다시피 밖으로 나갔다. 여직원은 한참만에 들어오면서 어떤 여자에게 “저 선생님을 아십니까?” 묻는다.

여자는 “아니, 찬구 사장선생 아닙니까! 어캐 된 겁니까? 아무도 마중을 안 나왔습니까?” 한다. 나는 모르겠는데 다행히 그는 나를 아는 교포총국의 김산옥 안내원이었다.

나는 김안내원이 나를 데리고 갈 줄로만 알았는데 얼굴만 내밀고 나간다.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나의 어리석은 추측이었다.

내가 들고 온 이민 보따리 같이 큰 두 개의 가방은 주인을 기다리며 싸늘한 콘크리크 바닥에 놓여져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벼라별게 다 들어 있다. 중국에서 준비한 손목시계용 배터리, 벽시계용 배터리. 이것만 해도 5키로가 넘었다.

또, 냉동 닭 3마리가 겹겹이 쌓인 비닐자루 속에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북경지사장의 처가에 전달해 달라는 물건이었다. 이 외에도 과자, 사탕, 빵, 손톱깎기 등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선물용으로 준비한 수 십 켤레의 양말과 속옷, 팬티스타킹, 스카프, 목도리 등은 항상 선물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이다.

순안공항에 초비상이 걸리고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이 교대로 왔다 갔다 하면서 한마디씩 내뱉었다.
“어디서 온 동폽니까? 혹시 간첩 아닙니까?
“처음 공화국에 오시는 건 아니디요?”
“공화국에 왜 왔습니까? 남쪽에서 보내서 왔습니까?”
눈에 쌍심지를 끼고 한마디씩 하면서 노려본다.
어떤 사람은 “때려 넣어야 갔어. 여기가 어디메라고 지 마음대로 와!”

“공화국 창건 이래 최초로 사증없이 입국한 이상한 사람이 생겼다”

공항 출입국관리 사무소장이 자기 방으로 안내를 한다. 조용히 묻는다.
“어떻게 사증 없이 비행기를 탔습니까?”
사실대로 자초지종 경과를 이야기 했다. 엄포를 놓는다. 오늘은 나가는 비행기가 없으니 4일 동안만 여기 공항에서 대기했다가 토요일 북경으로 나가라고 했다.

“공화국 창건 이래 최초로 사증 없이 입국한 이상한 사람이 생겼는데, 공항에 잠잘 방이 없어 어카나?” 사무소장의 날 벼락이 떨어진다.

이제야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약해진다. 떨리기도 한다. 이대로 구속돼 간첩 누명까지 쓰고 아오지 탄광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설마 내가 누군데. 정상참작을 하겠지. 나를 아는 평양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겠지. 머릿속으로 총리로부터 높은 사람들의 모습들이 유성처럼 스쳐간다.(계속)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