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주민 삶의질 향상에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이유

독일과 한반도의 통일여건은 서로 차이가 많아, 독일의 경험을 그대로 한반도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①공산 독재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된다는 점 ②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바뀐다는 점 ③적대적, 이질적 체제에서 살아온 민족이 하나의 체제 밑에 통합된다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독일통일의 경험을 통해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① 안정되고 부강한 국가·사회 건설이 가장 중요한 선결요건


동독주민들이 동독을 버리고 서독과의 통합을 선택한 것은 서독이 동독주민들이 가장 동경하는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서독은 선진적 민주제도, 풍요로운 경제, 안정된 사회를 이룩함으로써 동독주민들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우월한 서독의 존재는 동독 공산정권의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공산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환멸을 심화시켜, 동독주민들이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서독에의 편입을 선택토록 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또 미국이 독일통일을 적극 지원하고, 영·불·소 3개국이 독일통일을 결국 수용하게 된 것도 독일이 부강하고 국제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 그 배경이 되었다. 우리도 북한주민들의 동경 대상이 되고 국제적으로도 더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통일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다.


② 원칙의 고수와 도덕성의 확보가 통일의 밑거름


서독정부가 국내외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내외 정책의 기본원칙을 고수한 것이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첫째, 국내의 반대와 소련의 중립화 유혹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친미, 친서방 노선을 지속함으로써 소련과의 화해와 통일시 미국의 지원확보가 가능했다. 둘째,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에도 불구하고 동독을 외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동서독 국민들이 통일열망을 버리지 않도록 했다.


셋째, 동독의 항의와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본법 제23조 영토조항과 제116조 국적조항을 유지하면서 동독 탈출자를 전원 수용함으로써 동독혁명과 독일통일의 발판을 만들었다. 넷째,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 시 “대가 없는 지원불가” 방침을 고수함으로써 동독의 정책변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다섯째, 동독정부와 사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잘츠기터 중앙기록 보존소를 유지함으로써 동독 공직자들의 도덕적 경각심을 일깨우고 통일 후 동독공직자의 재임용 심사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서독의 ‘도덕적 힘’도 동독주민들이 서독편입을 결정하고 2차 대전 전승국들이 독일통일을 승인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서독은 나치죄과를 철저히 반성하고 재발방지에 노력함으로써 강력해진 독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해소할 수 있었다.


내독 정책에서는 ‘인도주의 실현’을 최우선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동서독 주민간의 왕래와 교류 촉진, 동독교회 지원, 동독정치범 석방교섭, 서독방문 동독주민에 대한 환영금 지불 등을 통해 이산가족의 고통완화와 동독주민의 삶의질 향상에 노력함으로써 대동독 관계에서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서독정부의 노력이 동독주민들로 하여금 평소 서독을 동경하고 서독에의 편입을 선택토록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북한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


③ 화해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힘의 우위’의 뒷받침이 필요


공산국가와의 관계에서 ‘힘의 우위’가 뒷받침되어야 협상에 의한 문제해결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1980년대 미국이 소련과의 긴장완화와 전략무기 제한협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전략방위구상(SDI)를 통해 소련을 압박한 것이 주효했다. 서독도 확고한 친서방 노선을 통해 힘의 우위를 견지한 것이 소련, 동독과의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1979년 소련이 동독과 체코에 SS-20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했을 때 서독정부가 국내외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나토의 이중결정”에 따라 중거리 핵 미사일의 서독배치를 수용함으로써 1987년 12월 소련이 미국과의 중거리 미사일 협정체결에 응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적대적 상대와의 교섭은 선의와 호의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④ 경제적 지원은 전략적 고려 하에서 추진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정부는 동독과의 교류, 협력을 적극 추진하면서도 대동독 지원이 동독 공산정권 강화에 기여하지 않을지 여부를 신중히 고려했다. 아울러 동독에 경제지원을 할 때에는 반드시 대가를 받아내는 등 전략적 고려 하에서 교류, 협력을 추진했다.


특히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서독정부가 취한 여러 가지 조치들은 서독 정부가 전략적 고려 하에 유연성을 가지고 대동독 정책을 추진해 왔음을 보여준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 콜 총리는 모드로우의 “조약공동체” 제의가 통일압력 회피와 경제지원 확보를 위한 기만전술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 사항 계획”에서 이 제안의 수용의사를 밝혔다. 모드로우의 제안을 구실삼아 서독사회에서 금기시 되어 오던 통일문제 논의를 자연스럽게 공식화하려는 의도였다.


콜 총리는 1989년 12월 모드로우 동독총리와의 드레스덴 회담에서도 같은 의사를 밝히면서 적극적인 경제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동독이 자유선거를 결정한 후에는 동독의 간곡한 요청과 사민당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경제지원을 거부함으로써 동독이 통일에 응하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콜 정부가 한 번도 동족애의 감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전략적 고려 하에 동독과의 교섭에 임했던 것이 신속한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사례는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전략적 고려하에 유연성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⑤ 통일을 위해서는 적극적 외부지원자가 필요


독일통일 과정에서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통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부시 대통령은 1989년 5월 이후 독일통일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명확히 함으로써 콜 총리가 그 해 9월 이후 공개적으로 통일을 거론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동독혁명으로 독일통일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자 미국은 2차 대전 전승국들이 독일통일을 수용하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이 초기부터 독일통일을 적극 지지한 것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서독이 친서방, 친미 기조 하에 미국과 긴밀한 유대를 지속해 온 데다, 통일이 가시화 되자 미국의 제시조건을 주저 없이 수용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우리도 우리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해 줄 수 있는 핵심우방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⑥ 통일을 위해서는 국가 최고지도자의 확고한 의지가 중요


독일통일 과정에서 콜 총리의 확고한 의지와 적극적 노력은 동독주민의 절망과 분노를 통일 에너지 전환시키고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반도 통일에는 독일보다 훨씬 큰 위험과 희생이 수반될 것이므로 확고한 의지와 결단력, 그리고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국가 지도자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⑦ 통일의 기회는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다는 점에 유의 필요


독일의 경우 통일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통일의 기회가 그렇게 빨리 도래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더욱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콜 총리도 통일에는 4~5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동독이주민의 폭증, 동독경제의 붕괴, 동독주민의 조기통일 요구, 소련의 개혁정책 후퇴 가능성 등 급격한 정세변화로 신속한 통일을 추진함으로써 일부 시행착오 과정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①동독주민의 자유의사에 따라 통일이 이루어졌고 ②동서독 주민 간에 적대감이 없었고 ③서독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④그간의 교류·협력 과정에서 동독에 관한 지식이 상당히 축적되어 있었고 ⑤유능한 관료조직의 뒷받침이 있어 큰 무리 없이 통일작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따라서 역사발전 과정에는 의외성도 많다는 점을 감안, 다양한 시나리오를 마련하는 한편, 통일기회가 갑자기 도래할 가능성에 대비, 사전에 통일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다.


⑧ 통일후유증은 불가피한 ‘분단후유증’이라는 인식 필요


독일은 준비 없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통일기회를 맞아 통일 후 여러 가지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후유증은 이미 분단 시에 잉태된 “분단후유증” 또는 “사회주의 실험의 후유증”이어서 후유증 없는 통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경제를 회생시킨 후 점진적인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단기간이 길어지고 남북한의 경제격차가 심화될수록 통일후유증은 더욱 증폭될 것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통일후유증이 두려워 점진적 통일을 추구하거나 후유증 없는 통일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보다는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국민적 의지를 결집하여 신속한 통일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통일비용이 곱절 이상 든다 해도 나는 단 1초도 통일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민당 출신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총리의 언급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⑨ 통일에는 나눔과 고통분담의 자세가 필요


통일후유증은 불가피하게 수반되며 사전준비를 통해 이를 완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눔과 고통 분담의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독일의 경우 세금인상, 사회복지 혜택의 축소,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의 통일비용 분담, 공채발행을 통한 세대 간의 통일비용 분담 등으로 나눔과 고통분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통분담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통일비용 부담을 더욱 힘겹게 느끼게 되었다. “분단(Teilung)은 분담(Teilen)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로타 드메지어 전 동독총리의 언급은 고통분담 자세의 중요성을 적절히 묘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