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통일 과정에서 저지른 실책은?

통일과정에서 독일정부가 저지른 실책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점들이 지적된다. 그러나 독일에서 일반적으로 공감을 받고 있는 실책은 ①통일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는 점 ②동독의 경제상황을 과대평가했다는 점 ③서독의 제도를 너무 빨리 이식하려 했다는 점 ④통일 후 세금을 더 많이 인상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이런 문제들은 한반도 통일 시에도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이므로 그의 내용과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① 베를린 장벽 붕괴 전까지 통일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서독정부는 베를린장벽 붕괴 시까지 통일에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기본법 전문에 규정되어 있는 “독일국민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통해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달성한다”는 것 외에 구체적인 통일방안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베를린장벽 붕괴 시까지 독일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드물었고 그렇게 신속히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더욱 없었다. 이는 2차 대전 후 서독에서 “통일을 얘기할수록 통일에서 멀어진다”는 인식이 널리 펴져있어 통일논의의 제기가 금기시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독은 동서독 기본합의서 체결 이후 20여 년 동안 빈번한 교류·협력을 통해 동독내 사정을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고 정부 및 민간분야에 동독사정에 정통한 전문 인력들이 많아 그나마 통일작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② 동독의 경제상황을 과대 평가했다.

통일 이전까지 동·서독 경제연구소들 간에 빈번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서독 측은 동독 경제사정에 어느 정도 정통하다고 생각하고 통일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한 푼도 없다던 동독의 외채는 200억 달러에 달했고, 서독의 1/2 수준은 될 것이라고 평가한 동독의 생산성은 서독의 1/4에 불과했다.

동독 국유재산 매각을 통해 1조 2,000억 마르크, 최소한 6,000억 마르크의 통일비용 조달이 가능할 것으로 추정했으나 부채청산과 매각경비 지출로 2,564억 마르크의 적자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동독 경제상황을 잘못 파악한 것은 동독정부가 발표한 통계가 매우 왜곡되어 있었던 데다 평소 서독이 동독경제를 각 분야별로 상세히 파악할 필요가 없었던데 기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③ 서독의 제도를 너무 빨리 동독지역에 이식하려 했다.

통일조약에는 서독제도의 이식을 유예하는 조항을 많이 두고 있었으나 통일 후 체제이식 과정에서 그 기간이 너무 짧게 설정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오류는 과거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된 사례가 전혀 없어 자료와 경험이 부족했던데 기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당초 독일정부는 과거 동독 탈출자들의 서독체제 적응기간이 1년 6개월 정도였던 점을 고려, 2,3년 후에는 대부분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통일 후 동독인들은 주변에 ‘보고 배울 이웃’이 없어 적응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④ 통일 후 세금을 더 인상했어야 한다.

통일 후 서독정부는 「연대세」의 신설, 부가가치세 등 일부 세율의 인상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주로 공채발행과 사회보장 기금으로 통일비용을 조달함으로써 공공부문 적자가 대폭 확대되고 사회보장 기금의 부실을 초래했다.

이는 콜 총리가 1990년 12월 선거를 의식하여 세금인상을 회피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만약 콜 총리가 2차 대전 후 영국의 처칠 총리처럼 국민들의 고통분담을 적극적으로 호소하면서 세금을 인상했다면 통일 후 경제사정은 훨씬 빨리 호전되었을 것이라는 비판도 많다.

2003년 사민당 슈뢰더 정부가 세금인상과 복지혜택 축소를 골자로 하는 「Agenda 2010」을 추진한 후 3년 만에 독일경제가 급격히 호전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비판이 타당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⑤ 동독경제 재건에 필요한 기간을 과소 평가했다.

통일 당시 독일정부는 5년 내지 10년이면 동독의 경제수준을 서독 ‘못 사는 주’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20년이 지나도록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예상이 빗나간 것은 근본적으로는 정치인들이 선거를 의식하여 ‘장밋빛 약속’을 한데 기인하지만,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도 그 원인이 된 것으로 해석된다.

즉, 예상보다 훨씬 낮았던 동독의 경제력과 생산성, 동독경제의 급속한 붕괴, 코메콘(COMECON) 경제협력 체제의 붕괴, 동독지역의 급격한 임금상승, 1992년 이후 수년간 지속된 세계적 불황 등은 통일 당시에는 예상치 못했던 요인이다.

⑥ 동독지역 투자를 집중적으로 하지 않았다.

통일 후 동독지역에 대한 투자를 경제특구 같은 것을 만들어 집중적으로 투자하지 않고 각 지역에 분산투자를 함으로써, 각 지역에서 동일한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전략거점을 중심으로 한 확산효과를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연방제 국가인 독일이 각 지역을 차별적으로 대우하기가 어렵다는 점에 기인하나 독일정부 관계자들이 경제특구 중심의 집중투자가 가져 올 효과에 대한 인식이 미흡했던 것도 원인으로 지적된다.

⑦ 동독 노동자의 임금을 너무 급속히 인상했다.

1990년대 초 동독 노동자의 임금은 서독 노동자의 7.4%에 불과했으나 1990년 말에는 36.8%, 1991년 중반에는 50%, 1994년 69.7%로 급속히 인생됐으며, 시간급은 1990년 그리스, 1991년 아일랜드, 1992년에는 미국을 능가했다. 2002년 동독 노동자의 생산성은 서독 노동자의 71.1%에 불과했으나 임금은 목표치인 서독의 80%보다 조금 적은 77.5%에 달하여 동독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동독경제의 회생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이렇게 동독 노동자의 임금이 급격하게 인상된 것은 화폐교환 비율을 실제보다 높게 책정한데도 원인이 있지만, 통일 이후 동서독 노동조합 간의 통합이 급속히 이루어진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즉, 노동조합 통합시 동독 노동자들이 생계비 증가와 서독 노동자들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임금인상을 강력히 요구한 데다, 서독 노동조합들이 동독 노동자의 서독이주와 서독자본의 동독으로의 이탈 방지를 위해 이에 동의한 것이 그 배경인 것으로 밝혀졌다.

⑧ 통일초기 정치인들이 너무 많은 장밋빛 약속을 했다.

통일 후 내적통일을 원만히 달성하기 위해서는 나눔과 고통 감내의 과정이 필수적이었으며,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이를 호소하며 국민들의 동의를 이끌어 냈어야 했다. 그러나 1990년 12월 선거를 의식한 콜 총리는 “3~4년 내에 동독경제를 서독 못사는 주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있으며, 누구도 통일로 더 나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동서독 주민들이 모두 헛된 기대를 갖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정치인들의 선거를 의식한 장밋빛 약속은 결과적으로 독일 국민들이 잘못된 기대를 갖도록 하여 통일 후유증 극복을 더 힘겨워하는 요인이 된 것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콜 총리가 통일 후 경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를 안했기 때문에 통일독일의 경제가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의견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