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독일통일 후유증이 크게 부각된 배경은?

[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 햇볕정책 추진 위해 독일통일 후유증 거론해

'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는 1990년부터 3년 동안 독일 통일을 직접 목도(目睹)한 염 교수의 소중한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교훈 등으로 채워집니다. 2011년 염 교수가 집필한 '올바른 통일준비를 위한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단행본 내용을 바탕으로 게재합니다. 총 50여회 계획으로 연재 중이며, 남북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독일의 통일작업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음에도 독일통일 후유증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몇 가지 독일적 특성에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①독일인들은 불황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 ②통일 후 통일의 혜택을 피부로 느끼기 어려웠다는 점, ③민족의식을 동원하여 고통분담을 호소할 수 없었다는 점 등도 통일 후유증이 실제보다 더 크게 부각된 배경인 것으로 보인다.

① 불황에 익숙하지 않은 독일

2차 대전 종전 이후 서독은 "경제적 거인, 정치적 난장이, 군사적 지렁이"로 불렀지만 '라인강의 기적'에 힘입어 경제에서는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안정된 복지혜택을 누려왔다. 따라서 1982년 이후 처음 찾아온 불황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더욱이 1991년 찾아온 세계적 불황, 선진병에 걸린 서독경제의 구조재편, 통일비용 부담이라는 삼중고를 함께 겪게 되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② 통일의 실익을 느낄 수 없었던 독일인들

통일 후 기업인들이 호황을 누린 것과는 달리 대다수의 서독인들은 일상생활에서 통일의 실익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들은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았고 동서독 간의 왕래도 비교적 자유로워 '이산의 고통'도 크지 않았으며, 통일 후 분단비용 절감에 따른 혜택을 느끼지도 못했다. 오히려 통일비용의 조달, 90억 달러에 달하는 걸프전 비용부담,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지원 등 국제적 역할 증대로 경제적 부담만 늘어났다. 이렇게 피부에 와 닿는 이득이 없고 부담만 늘었으니 통일이 지겨울 수밖에 없다.

③ 통일을 위해 민족감정을 동원할 수 없었던 독일

우리나라에서는 "게르만 민족의 단결심"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과거 서독인들은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이 별로 높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이 통일된 것은 불과 120여 년 전 일이며, 독일이 통일국가로 존재했던 기간은 74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45년의 분단기간이 이어져 민족감정이 두터워지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2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에서는 나치의 죄과 때문에 '민족'이나 '조국'이라는 개념은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민족감정을 들먹이는 것은 위험한 일로 여겨져 정치적 금기사항이었다. 따라서 민족의식이나 국민적 일체감은 국가적 자산이 아니라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수상쩍은 일'로 여겨졌다. 그리고 독일통일보다는 유럽통합이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교육되어 왔다.

동독 평화혁명시 나타난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는 구호는 민족의식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서독의 원조를 기대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통일 후 독일국민의 내적 통일을 위해 애국심과 민족적 단결심이 가장 필요했던 시기에 정치인들은 민족감정이나 국민적 일체감을 동원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니 일반국민들에게는 통일비용 부담이 더욱 힘겹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④ 통일 후유증 부각이 필요했던 사정

통일 당시의 몇 가지 국내·외적 상황도 통일후유증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독일통일 후 동유럽의 개혁과 걸프전 등을 계기로 독일이 국제사회를 위해 더 많이 기여해야 된다는 요구가 빗발쳤고, 우방국들의 호의로 통일을 이룬 독일로서는 이를 회피하기가 어려웠다.

각종 지원요구에 시달린 독일정부와 언론이 독일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통일후유증 문제를 거론하는 일이 잦았고, 이것이 독일통일 후유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또 통일 후 경제구조 개편을 위해 국민들의 고통 감내를 호소하는 과정에서도 통일후유증 문제가 부각되었다. 통일 후 독일에서 두 가지 상반된 경제구조 재편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동독지역에서는 자본주의 제도의 도입작업이 진행되었고 서독지역에서는 선진병의 치유를 위한 자본주의의 극복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부, 언론, 기업이 모두 어려움을 강조하고 국민들에게 고통분담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독일경제의 어두운 측면과 통일후유증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⑤ 동독 주민들의 과도한 기대와 엄살

동독 주민들의 과도한 기대와 '엄살적 반응'도 통일후유증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동독인들은 통일이 되면 단기간에 서독인과 같은 생활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더욱이 통일독일에서는 노동의 강도도 훨씬 높고 항상 실직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또 동독주민들이 더 많은 정부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불만과 어려움이 심각한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일 전과 현재의 상황을 비교하는 질문에 대해 1999년에는 "더 나빠졌다"는 응답이 15%에 불과했으나 2008년에는 28%로 증가했다는 점이 이런 현상을 설명해 준다.

⑥ 한국에서 독일통일 후유증이 크게 부각된 배경

우리 국민들이 독일통일 후유증과 장래 우리의 통일후유증에 큰 관심과 우려감을 갖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는 독일통일 후유증이 예상보다 심각했다는 점에 기인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들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독일통일 이후 우리가 북한에 대해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독일통일 후유증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통일 이후 우리 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등 북한과의 화해·협력 관계를 성급히 추진하기 시작했고 "먹고 먹히는 통일"을 두려워하는 북한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조급한 통일, 흡수통일을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논거의 하나로 독일통일 후유증을 자주 거론한 것이 우리 사회에 독일통일 후유증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우리 정부가 햇볕정책과 대북지원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독일통일 후유증 문제가 자주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즉,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통일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대북지원을 통해 북한경제를 회생시켜 놓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과정에서 독일통일 후유증이 거론되는 경우가 많았다.

셋째, 독일 사민당 계열 인사들의 조언이 미친 영향도 큰 것으로 보인다. 독일통일 직후 한국을 다녀갔거나 한국 언론의 인터뷰에 응한 인사들 중에는 서독 기민당 계열 인사들보다는 사민당 계열 인사들이 많았다. 이들이 여당인 기민당 계열 인사들보다 덜 바빴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사민당이 '독일통일의 최대 패배자'가 된 이후 이들이 우리에게 충고한 말은 대부분 통일을 헐뜯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 등 사민당 계열 인사들은 물론이고, 한국을 방문하고 우리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하버마스, 귄터 그라스, 패트릭 쥐스긴트 등 인사들은 독일 내에서도 통일에 대해 가장 험담을 많이 하는 좌파 지식인들이다.

따라서 독일통일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 이들 인사들의 주장내용이 자주 보도된 것도 우리 사회에 독일통일 후유증의 심각성이 부각된 또 다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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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돈재

-(現)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초빙교수
-(前)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장
국가정보원 제1차장
주 독일대사관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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