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반체제 세력은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동독혁명시 어떤 역할을 했는가?

1987년 이후 동독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가끔 있었고, 1989년 5월 이후에도 여행자유와 환경보호 등을 주장하는 시위가 몇 차례 있었으나 동독 내에 조직적인 반체제 단체는 없었다. 따라서 모든 단체들이 1989년 9월 이후에 결성되어 세력이 미약했고 비밀경찰 슈타지(Stasi)가 이들 단체에 침투해 동향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단체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있어 급속한 세력 확장과 조직적 활동이 가능했으며, 동독 평화혁명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반체제 세력들은 정권을 담당할 능력이 없는 데다 사회주의통일당과 제휴하면서 동독의 존속에 목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동독의 자유선거 이후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반체제 단체 결성배경


1989년 8월 이전 동독에서는 가끔 반전운동이나 환경보호 운동 등이 있었으나 상설조직 없이 이슈가 있을 때마다 모였다 헤어지는 정도였다. 그동안 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정치범 석방거래로 서독으로 이주한 데다, 1953년 동베를린 노동자 시위가 소련 탱크에 의해 무참히 진압된 이후 동독사회에는 반체제 운동이 주민들의 고통만 가중시킬 뿐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반전 및 환경보호 운동을 표방한 단체들은 동독 보안당국이 서독 내 좌파세력과의 연계 활동과 동독 내 반체제 동향 파악을 위해 은밀히 지원하거나 양성해 놓은 경우가 많아 적극적인 반체제 활동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반체제 조직 현황과 역할


동독 국가보안부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1989년 6월 현재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은 160개 조직, 2,500여 명이었으나 핵심요원은 6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 조직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있어 세력규합과 타 지역과의 연계 활동이 쉬워 급속한 세력 확장이 가능했다.


동독 평화혁명 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조직은 「신광장」(Neues Forum)과 「민주주의 지금」(Demokratie Jetzt)이다. 그 가운데서도 동독 반체제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신광장」은 1989년 9월 13일 교회관계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직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발전과정에 참여하고 동독 전체에 정치적 공동 광장을 제공한다” 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조직은 단기간 내에 급속히 확대되어 9월 25일 라이프치히에서 전국규모의 모임을 갖고 지역별, 주제별로 결성되어 있는 전국 각지의 시민조직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 지금」은 1989년 5월 6일 지방선거 시의 부정행위를 규탄하면서 9월 16일 결성되었으며, 종교인과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연합하여 ①권위주의 국가에서 공화제 국가로, ②생산수단의 국가독점에서 민영화로, ③환경파괴와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자연과의※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조화를 추구한다고 표방했다. 사회민주당(Sozial Demokratische Partei:SDP)은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위성정당 지도자들이 기존 체제에서 이탈하여 창설한 조직으로 1989년 10월 9일 서독사민당(SPD)의 지원을 받아 결성되었으며, 동독 주민들로부터 사회주의통일당의 대안정당으로 인식되었다.


그 외에도 1989년 10월 1일 결성된 개신교 목사·신자·문화인·의사·법률가들의 모임인 「민주혁신」(Demokratisher Aufbruch)은 동독의 민주화에 목표를 두었고, 1989년 9월 초 결성된 재야 사회주의 단체들의 연합체인 「뵐레너의 모임」(Boehlener Plattforum)은 동독사회의 혁신을 표방했으며, 「베를리너 앙상블」(Berliner Ensemble)은 민주화를 위한 예술·문화인들의 모임이다. 이들 조직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을 확장하면서 동독 주민들의 시위 참여를 유도했다. 동독 평화혁명 과정에서 군중시위가 폭력화되지 않았던 것은 성직자들이 중심이 된 시위주도 세력들이 소련군의 개입과 사상자 발생을 우려, 시위군중의 폭력자제를 적극 설득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동독 반체제 세력의 한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일당 독재체제가 붕괴된 후 「신광장」, 「민주주의 지금」, 「민주혁신」 등 민권단체들은 1989년 12월 이후 사회주의통일당 등 동독의 기존정당들과 함께 원탁회의의 일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동독의 개혁이었지 민주혁명이나 통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많은 동독인들이 개혁된 동독이 서독과는 별개의 주권국가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궁극적으로 통일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사회주의는 유지돼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동독 반체제 인사들도 서독 좌파 지식인들처럼 동독의 개혁이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직 서방의 물질주의와 착취에서 해방된 독자적이고 더 나은 사회주의 국가를 원했을 뿐이다.


1990년 3월 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 초기에는 사민당, 「민주혁신」, 「신광장」, 「민주주의 지금」, 「좌익연합」, 「평화와 인간의 권리를 위한 발의」 등 6개 단체가 선거연합을 구성했다. 그러나 서독 사민당의 지원을 받은 사민당이 탈퇴하고 뒤이어 좌익연합이 탈퇴함으로써 조직이 대폭 약화되었다. 그 후 민권단체들은 서독 녹색당의 지원을 받은 녹색당을 중심으로 「연대 ’90」(Bϋndnis ’90/Grϋne)을 결성하여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반체제, 민권그룹들은 정치현실에 둔감하고 정권담당 능력이 없는 데다 그들이 추구했던 목표도 독일통일이 아닌 동독 사회주의의 개량과 동독의 존속이었기 때문에 자유선거에서 2.9%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그 후 1990년 12월 2일 실시된 통일독일 최초의 전 독일 선거에서 5.8%(8석), 1994년 10월 16일 제13대 총선에서 7.3%(49석) 득표에 그쳐 통일 후에는 거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