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서 기민당 중심의 '독일연맹'이 선거 승리한 이유

[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 신속한 통일 약속…동독주민, 서독사회에 대한 동경 강해

'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는 1990년부터 3년 동안 독일 통일을 직접 목도(目睹)한 염 원장의 소중한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교훈 등으로 채워집니다. 2011년 염 원장이 집필한 '올바른 통일준비를 위한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단행본 내용을 바탕으로 게재합니다. 총 50여 차례 연재될 예정이며, 남북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통일 문제에 대한 동독 주민들의 태도를 조사한 신뢰성 있는 자료는 없다. 동독 정부가 1974년 헌법 개정 시 통일조항을 삭제한 이후 통일 문제에 대한 견해표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혁명 시 동독 주민들이 보여준 태도를 보면 동독 주민들은 통일 열망을 거의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동독 주민들은 소련이 버티고 있는 한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데다 동독 공산정권이 "사회주의 독일민족 국가"의 건설을 국가목표로 하고 있어 통일 문제는 담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또 서독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식인들 가운데는 독일인, 유럽, 세계를 위해서도 분단된 독일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특히 민권운동 지도층들이 그런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989년 10월 소련이 동독 공산정권에 등을 돌리고 서독 정부가 적극적인 통일 의지를 보이기 시작하자 동독 주민들은 자유롭고 풍요로운 서독 사회를 동경, 망설임 없이 통일을 선택했다.

동독 평화혁명 이전의 태도

통일 문제에 대한 동독 주민들의 태도를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사회주의가 전 세계에 걸쳐 관철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1975년 조사에서는 '확신한다'는 응답이 63%,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응답이 9%였던 반면, 1988년 이후 조사에서는 '확신한다'는 응답이 10% 이하로 떨어지고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응답이 60~70%에 달했다.

'막스-레닌주의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는 1975년 조사에서 '확신을 갖고 동의한다'는 응답이 46%,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14%였으나, 1989년 10월 조사에서는 '확신을 갖고 동의한다'는 응답이 6%로 떨어지고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2%에 달했다. 동독 체제에 대한 염증이 보편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85년 14세에서 29세까지의 동독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한 민족의식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서독인을 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가 68%, 별개의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32%였다.

1984년 통일을 원하는지 여부에 대한 조사에서는 '원한다'가 76%, '원하지 않는다'가 13%,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가 11%로 통일을 원한다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984년 실시된 독일의 재통일 가능성을 묻는 조사에서는 가능하다는 응답이 4%, 불가능하다는 응답이 60%로 절대다수의 청소년이 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조사에서 '통일을 원한다'는 응답과 '통일이 가능하다'는 응답이 모두 동독 청소년 쪽이 높게 나타나 동독 청소년들이 서독 사회를 동경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동독 주민들이 서독 체제를 동경하고 있었지만 통일에 대한 소망은 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된 데다 동서독 지식인들 사이에 독일이 나치 때처럼 강대국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도 많았기 때문이다. 1970년 3월 빌리 브란트 총리가 제1차 정상회담을 위해 에르푸르트를 방문했을 때 동독 주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한 것도, 통일 열망이라기보다는 동독과 교섭을 잘해서 교류와 왕래가 확대되도록 해 달라는 기대를 의미한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동독혁명 과정에서의 태도

1989년 9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촛불시위가 전국으로 확산, 10월 18일 호네커가 실각했고 그 후 시위는 더욱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때까지도 동독 주민들의 요구사항은 '개혁'이었고 통일 열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11월 22일 라이프치히 시위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한 국민이다"라는 구호가 등장한 이후 각 지역 시위에서 "마르크가 안 오면 우리가 가겠다"는 등의 다양한 통일구호가 등장하면서 통일열망은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서독 콜 총리가 모드로우 동독 총리와의 회담을 위해 12월 19일 드레스덴을 방문, 동독 군중들 앞에서 "나의 목표는 통일"이라고 언급했을 때 동독 주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이를 계기로 동독 주민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염증은 통일 에너지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는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1989년 11월 20일부터 27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통일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52%를 차지했으나 1990년 1월 이후에는 통일찬성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동독 원탁회의가 당초 1990년 5월 6일로 예정되었던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 일자를 3월 18일로 앞당긴 것도 공산통치와 동독의 존속을 연장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여론조사 결과 공산당 후신인 민사당(PDS)이 좌익계열을 흡수하면 계속 집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다른 정치조직들이 전국조직을 갖출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선거 일자를 앞당긴 것이다.

그러나 선거 직전까지도 '신속한 통일'에 대한 열망은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1989년 12월 및 1990년 2월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점진적 통일을 약속한 사민당은 53%의 지지를 받은 반면,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기민당 중심의 '독일연맹'은 24%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3월 12일 사민당 여론조사에서는 동독 기민당이 20%의 지지를 얻은 반면 동독 사민당은 44%를 얻어 압승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3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동독 사민당은 21.8%의 지지를 얻는 데 그친 반면,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48.1%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통일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선거결과가 예측과 다르게 나타난 것은 풍요로운 서독 사회에 대한 동경, 동독 개혁세력에 대한 실망, 동독경제 상황의 급속한 악화, 동서독 화폐를 1:1로 교환해 주겠다는 콜 총리의 약속, 소련의 개혁정책이 언제 후퇴하고 소련 탱크가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걱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민심 흐름이 빨리 변했다는 데 원인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 외에도 동독 주민들이 여론조사에서 솔직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는 점, 여론조사가 부실하게 진행되었다는 점도 그 이유로 지적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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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돈재

-(現)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초빙교수
-(前)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장
국가정보원 제1차장
주 독일대사관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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