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밑거름 된 동서독 교류·협력②

스포츠 교류


동서독 간의 스포츠 교류도 정치관계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에 1972년 12월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전까지는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2차 대전 후 동서독 정부수립 시까지는 교류가 전혀 없었고 1950년부터 동독 측의 제안으로 전 독일 선수권대회, 전 독일 체육회담 및 전 독일 체육인회담 등이 개최되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동독 측이 서방진영의 결속과 서독의 서구편입을 방해하기 위해 스포츠 교류를 정치선전장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동서독이 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출전한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1956년 겨울 올림픽부터 1964년 여름 올림픽까지 동서독은 총 6회에 걸쳐 단일팀으로 출전했으며 특히 1964년 10월 동경 올림픽 파견 선수단 규모는 총 376명으로 일본, 미국, 소련에 이어 4번째로 큰 규모였다. 그러나 동서독이 단일팀으로 출전하게 된 목적과 배경은 전혀 다르다. 서독 측은 동독과의 민간차원의 교류·협력 증진에 목적을 두었으나 동독 측은 1955년 6월 파리 개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단일팀 출전을 조건으로 IOC에 임시가입이 승인되었기 때문에 IOC 정식가입을 위해 단일팀 구성에 반드시 참여할 필요가 있었다. 


올림픽 단일팀 출전과는 별개로 1957년부터 1961년 8월까지 동서독 간에는 매년 1530회(1957), 386회(1958), 624회(1959), 683회(1960), 738회(1961)에 이르는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후 서독 측이 “동서독 간에 정상적인 왕래가 가능할 때까지 일체의 스포츠 교류를 단절” 하기로 결정함으로써 1966년까지는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선수선발 경기 외에는 모든 스포츠교류가 중단되었다.


1972년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된 후 1974년 5월 동서독 체육회장 간에 스포츠 교류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한 데 이어 1986년 5월 체결된 문화협정 제10조에도 스포츠 분야의 교류·협력을 지원토록 되어 있어 양측 간의 교류가 대폭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매년 연간 교류계획을 작성한 후 체계적으로 추진되었다.


동서독 간의 스포츠 교류는 서독 측의 의도대로 상호교류의 증가, 민족화합 및 민족 동질성 유지에 부분적으로 기여했으나 동독 측이 이를 사회주의 체제 강화 및 우월성 선전과 동독의 국제적 지위 향상 수단으로 활용하는데 치중하면서 가급적 교류를 제한했기 때문에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청소년 교류


1949년 분단 이후부터 서독 독일청소년연맹(DBJR)과 동독 독일자유청소년연맹(FDJ) 간에 교류가 추진되었으나 상호간의 불신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체결, 1975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헬싱키 의정서 타결 및 1981년 10월 동서독 정상회담에서의 청소년 교류 활성화 합의는 청소년 교류 활성화의 계기가 되었다.


청소년 교류는 상호방문, 토론, 유적지 및 기관방문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서독 측에서는 주로 고교 1~2학년 학생들이 동독을 방문한 반면, 동독 측은 주로 26세 이상의 직장인들이 교류에 참가했다. 서독 학생들은 1987년 877회에 걸쳐 2만 2000명, 1988년 1090건 2만 6812명이 각각 동독을 방문했으며 동독 청소년의 서독방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서독정부는 민족의 동질성 유지, 동서독 청소년 간의 개인적 친분 조성, 동독에 대한 선입감 및 적대감의 완화에 목표를 두고 동독 단체여행 경비를 지원했으나 청소년들은 동독의 국경장벽, 열악한 생활환경과 사회통제 상황 등을 목격한 후 이질감만 심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동독정부는 서독 측의 끈질긴 요구가 있는 데다 여행확대를 통한 욕구불만 해소와 서독체제에 대한 환멸 유도 등을 목표로 교류를 추진했으나 동독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만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분야 교류


분단 이후 동독정권의 교회탄압으로 신도 수가 대폭 줄기는 했으나 1989년 현재 전체인구의 24.8%가 개신교, 5.6%가 천주교여서 동서독 교회 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져 왔다. 분단 이후 1961년 베를린 장벽 구축 이전까지는 동독정권의 방해에도 불구, 매년 동서독 종교인들이 참가하는 종교대회가 동서독 지역에서 번갈아 개최되었으나 베를린 장벽구축으로 중단되었다. 1980년대 서독에서 반핵 평화운동이 일어나자 동독정권이 동독 종교인의 집회참여를 허용, 상호교류가 활성화되고 1983년 루터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동독에서 개최된 7개 지역 종교대회에 서독 종교인들이 대거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주요 이슈였던 평화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의 입장이 달랐다. 서독 교회 측은 평화를 위해서는 대량살상무기에 바탕을 둔 억지전략 틀 안에서의 군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동독교회는 대량살상무기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억지전략의 무조건적 폐기를 주장했다.


한편 서독교회의 동독교회 지원은 동독교회의 활동을 활성화하고 동독교회가 동독혁명의 근거지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독교회는 1957년부터 1990년까지 동독교회 및 부속시설에서 직접 사용할 23억 마르크(1조 3800억 원) 상당의 물품과 동독교회가 현금화하여 사용할 28억 마르크(1조 6800억 원) 상당의 물품을 지원하여 동독교회가 목회자의 봉급 지불, 교회 및 부속시설의 유지에 충당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지원으로 동독교회는 76개의 부속병원(1만 2000개 병상), 양로원, 간병원, 직업훈련소, 유치원 등 복지시설을 운영하여 동독주민들의 고통완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동독교회의 이러한 역할은 동독교회가 체제저항 세력 양성의 중심이 되고 동독혁명이 폭력화되지 않도록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서독교회의 동독교회 지원사업 경비의 50%는 서독정부가 지원했다.


도시 간 교류


1960년대까지는 동독이 서독정부의 할슈타인 원칙에 대응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 간의 교류와 자매결연을 추진했으나 서독 측이 이를 거부했고, 동서독 관계 정상화 후에는 서독이 양측 도시 간의 자매결연을 추진했으나 동독이 거부하여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1985년 호네커의 고향인 서독 자를란트 주지사의 동독방문을 계기로 동서독 도시 간의 자매결연이 처음 이루어진 후 총 62개 도시 간의 자매결연이 성사되었으며, 700개의 서독 도시들이 자매결연을 희망했다. 서독 자매결연 도시 가운데는 사민당 집권 주가 41개, 기민당 집권 주가 15개여서 동독 측이 기민당 집권 주보다 사민당 집권 주와의 결연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매결연 도시 간의 교류는 교통, 주택, 환경오염 등 도시문제에 관한 정보교환과 체육·문화행사에의 교환방문이 주류를 이루었다. 서독 측은 도시 간의 교류를 통해 주민 간의 접촉과 왕래를 증가시켜 민족 정체성 유지와 분단극복에 기여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동독 측은 동독정권의 정통성과 국제법상의 지위 강화에 목표를 두고 일반시민 간의 접촉은 통제한 가운데 체제옹호 세력들이 접촉에 나서도록 함으로써 서독이 기대했던 목표를 이루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교류·협력의 성과와 한계


동서독 간의 교류협력은 동서독 정부가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가운데 추진되었다. 서독은 교류·협력이라는 ‘작은 발걸음'(small steps)을 통해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을 완화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하려는데 목표를 두었던 반면, 동독은 서독과의 각종 협정체결, 공식적 행사 개최 및 주민들의 여행 및 교류 욕구 충족을 통해 정권의 정통성과 안정성 및 국제법적 지위를 강화하려는데 목표를 두었다. 서독이 교류·협력을 ‘분단을 잇는 다리’ 또는 ‘통일을 향한 작은 발걸음’이라고 생각한 반면 동독은 분단의 장벽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벽돌을 쌓는 작업’으로 인식한 것이다.


또 서독은 자기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교류·협력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동독은 서독과의 교류가 공산체제의 안정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극히 경계하면서도 소련이 버티고 있는 한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되거나 서독에 흡수 통일될 가능성이 없다는 전제하에 동독과의 교류에 따른 실익을 확보하기 위해 교류에 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측 간의 긴밀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동독 측은 서독과의 교류가 체제안정에 미칠 영향을 우려, 수시로 교류·협력의 속도를 조절했으며, 서독 측도 교류가 분단 고착화에 미칠 영향을 신중히 고려하면서 추진했다. 동서독 기본조약에 문화교류 원칙이 명시되어 있었으나 동독이 이에 응하기까지는 13년이 소요되었던 것은 문화교류가 동독체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서독 측이 5000마르크 이상의 선물 반출 시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1987년 9월에 와서야 과학기술협정 체결에 동의한 것은 서독의 지원이 동독 공산정권 강화에 이용되지 않을지 여부를 신중히 고려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