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의 통일정책은…생존 연장해보려는 술책

서독은 통일이 헌법적 의무로 규정되어 있었던 반면, 동독은 서독과는 별개의 국가 건설을 헌법적 목표로 하고 있어 통일문제에 대한 입장이 현격하게 차이가 있었다.


동독은 1949년 헌법과 1968년 헌법에서는 통일관련 조항을 두었으나 1974년 개정 헌법에서는 삭제했다. 통일정책도 1960년대까지는 ‘국가연합 통일방안’을 제시하다가 1970년대 이후에는 두 개의 국가론을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독일국가’ 건설을 국가목표로 설정함으로써 ‘통일’은 국가목표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동서독 간에 통일문제에 관한 입장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1989년 11월 동독혁명 이전까지는 상호 간에 통일문제가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모드로우 정부가 ‘조약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시했으나, 이는 동독주민들의 통일열망에 호응하는 자세를 보이면서 서독의 경제지원을 얻어 동독의 존속을 모색하려는 위장전술에 불과했다. 동독의 통일정책 변천과정은 다음과 같다.


1949년 헌법의 통일관련 조항과 통일정책


1949년 제정된 동독헌법에는 통일관련 조항이 들어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1조 “독일은 불가분의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은 통일된 독일을 전제로 하고 있고, 동독정부도 동독이 독일제국의 계승권과 단독 대표권을 가졌다고 주장함으로써 분단 초기에는 통일을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통일문제에 대한 동독의 입장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1953년 9월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두 개 국가론을 제시하면서 동서독이 상호 국제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분단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55년 9월 소련과 체결한 동독 주권조약 전문에서는 “양국은 독일통일 실현을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 후 발표된 동독의 통일노선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통일이 국가목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독을 서독과 별개의 주권국가로 인정받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7년 1월 개최된 사회주의통일당(SED) 제30차 중앙위원회에서 채택된 국가연합 통일방안은 서독, 동독 및 서베를린으로 국가연합을 구성하되 국가연합에는 상부에 중앙권력을 두지 않고 각각 자기 나라의 의회와 정부에 권고안을 제시하는 역할만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동독의 구상은 중앙권력 보다는 구성원의 독립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독립국가로서의 동독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


1966년 12월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다시 동서독 간의 국교정상화와 불가침조약 체결, 유럽의 현 국경선 인정, 모든 유럽국가와의 국교정상화 등을 전제로 하는 ‘국가연합을 위한 10개항의 정책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1967년 1월 제7차 사회주의통일당 전당대회에서 통일은 국가목표지만 사회주의 하에서의 통일만이 가능하다고 선언함으로써 국가연합 통일방안을 사실상 포기했음을 시사했다.


이러한 동독의 국가연합 통일방안 제의는 통일을 염두에 둔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들의 의도는 동서독 주민들의 통일욕구에 대응하면서 국가연합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함께 국제기구에 가입함으로써 서독과는 별개 국가로 국제적 승인을 받으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1968년 헌법과 통일조항


1968년 개정된 동독헌법은 1949년 헌법과는 달리 통일에 관한 조항을 두고 있었다. 제8조 2항에는 “……독일민주주의공화국과 그 시민은 한걸음 나아가 제국주의자에 의해 강요된 독일분단을 극복하고 두 독일국가의 단계적인 접근을 통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기반 위에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한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도 독일의 재통일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니었다. 독일분단의 책임을 서독 측에 미루면서, 통일은 서독이 주장하는 자유선거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독과 서독의 단계적 접근을 통해 공산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동독 정권의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홍보용 조항이라고 볼 수 있다.


1947년 헌법과 통일조항의 삭제


1969년 12월 동독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서독 하이네만 대통령에게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조약 초안을 제시함으로써 국가연합 통일방안을 사실상 포기했음을 시사했다. 이어 동독은 1974년 10월 헌법을 개정하여 제8조 2항(통일조항)을 삭제하는 한편, 제6조를 개정하여 동독과 소련이 영구적인 동맹관계임을 명백히 했다. 따라서 그 이후부터 통일은 형식적이나마 동독의 국가목표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동독이 개정헌법에서 통일조항을 삭제한 것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고 1973년 9월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동독이 국제적으로 별개 국가로서 승인을 받게 되어 더 이상 헌법에 통일관련 조항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동독은 서독과 동등한 입장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각종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서독과는 별개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주력하게 된다.


모드로우 정권의 ‘조약공동체’ 통일방안


동독주민들의 시위가 격화되고 동독혁명 기운이 무르익어 가기 시작하자 동독 공산정권은 다시 통일방안을 들고 나왔다. 1989년 11월 17일 모드로우 총리는 인민회의에서의 성명을 통해 양독간의 ‘조약공동체’ 창설을 제의하고, 12월 19일 콜 총리와의 드레스덴 회담에서 이를 다시 제기하여 콜 총리와 계속 협의하기로 합의했다. 이어 1990년 1월 30일 고르바초프와의 회담에서 국가연합 방식의 통일을 추진하기로 합의했고. 2월 1일 동베를린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하나의 조국, 독일을 위한 4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이 방안은 베를린을 수도로 하는 연방제 중립국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것으로 ▲우선 동서독이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여 군사적 중립 ▲경제, 화폐, 교통 분야의 통일을 이루는 ‘조약공동체’를 형성 ▲중앙 및 지방의회와 정부기구 등을 각각 묶는 공동 정책기구들을 구성 ▲이들 공공기구에 양국의 주권을 이양하여 국가연합 또는 연방 형태로 단일정부를 구성하여 통일을 한다는 것이다.


모드로우는 4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하면서 이에 대한 시간적 일정이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으며, 제안내용에는 서독의 NATO 탈퇴와 독일의 중립화 등 서독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담고 있었다. 결국 모드로우의 ‘조약공동체 통일방안’도 통일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동서독 주민의 통일열망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서독의 경제지원을 받아 동독의 생존을 연장해 보려는 술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