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우위 ‘자석이론’이 한반도 통일에 주는 교훈

서독의 통일(내독)정책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째, 통일이 기본법상의 명제로 설정되어 있었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까지는 어느 정부, 어느 정당도 통일을 현실적인 정책목표로 설정하거나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냉전체제 하에서 통일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데다, 통일의 열쇠를 쥔 2차 대전 전승국들이 독일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어, 독일인들이 ‘통일을 외칠수록’ 통일에서 더 멀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둘째, 서독의 양대 정당인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은 서로 명확히 다른 통일노선을 추구하고 있어 집권당이 바뀔 때마다 내독정책의 기조가 상당히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친미·보수정단인 기민당은 ‘자석이론(Magnet Theory)’에 따라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통일정책을 추진한 반면, 사회주의 정당인 사민당은 통일이 사실상 어렵다고 보고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herung)의 기치 아래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증진함으로써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셋째, 서독 양대 정당의 정책노선이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 정책에서 몇 가지 기본원칙은 일관성을 유지해왔다는 점이다.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기본법 23조(기본법 적용대상 지역)와 116조(국적조항)가 그대로 유지되어 왔고,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친미·친서방 노선에 큰 변화가 없었으며, 내독정책에서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완화와 동독 주민의 ‘삶의 질’ 개선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 왔다는 점, 1968년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모든 정권이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는 점 등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중도정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 FDP)이 대연정 기간을 제외한 모든 기간 동안 기민당 혹은 사민당의 연립정부 파트너가 되었던 데다, 자민당 부총재인 한스 디트리히트 겐셔가 1974년 슈미트 정부 이후 1990년 독일통일 시까지 16년간 외무장관으로 재임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각 정권의 통일정책(혹은 ‘내독정책’) 및 대동독 정책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민당 아데나워 정부의 ‘힘의 우위’ 정책(1949.9~1963.10)


초대 콘라드 아데나워 정부는 국제정치 현실에 비추어 통일은 미래의 목표일 뿐 당면한 정책목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최우선 정책목표를 ➀서독의 완전한 주권회복 ➁경제재건 ➂서방과의 결속 강화에 두었으며,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자석이론’ 대로 서독이 정치·경제적으로 확고한 우위를 확보하면 동독의 붕괴와 소련의 점령지(동독) 포기를 유도하여 통일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아데나워 정부는 통일방안으로서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을 주장했고, 동방정책에서는 힘의 우위와 동독 고립화를 위해 서독의 유일대표성과 할슈타인 원칙을 견지했으며, 오더-나이세 국경선 인정을 거부했다.


아데나워 정부의 친서방 및 대소·대동독 강경정책은 국내외 정세변화로 중요한 시련을 맞게 되었다. 1961년 8월 동독의 베를린 장벽 구축으로 인한 제2차 베를린 위기와 1962년 미국·소련 간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아데나워의 강경노선에 대한 서독 국민들의 우려와 비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미·소간에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되고 사회당의 젊은 정치인 빌리 브란트의 ‘작은 걸음 정책'(Politik der kleinen Schritte)이 인기를 얻게 됨에 따라 아데나워 총리는 퇴진하고 그의 친서방·대동독 강경정책도 변화를 겪게 되었다.


에르하르트 및 키징거 총리의 변화모색(1963.1~1969.10)


아데나워의 후임인 에르하르트 총리는 아데나워 정부의 정책을 대부분 답습하면서도 국제정세의 변화를 반영, 대동독 및 대동유럽 관계 개선을 모색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경제부진으로 퇴진했다.


이어서 기민당과 사회당 간의 대연정으로 집권한 쿠르트 키징거 정부 시기는 대내외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 시기여서 부분적으로 정책노선 변경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동·서간의 데탕트가 진전되고 프랑스가 NATO군에서 탈퇴하는 등 서구동맹 간의 결속이 이완되기 시작했고, 제3세계에서 다수의 신생국이 출현함에 따라 친서방 일변도의 정책과 할슈타인 원칙의 지속이 어렵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전후에 태어난 68세대들이 친미적인 부모세대를 조롱하고 공산 혁명가인 체게바라와 호치민을 숭배하면서 동독과의 접촉 증대를 요구하여 기존 정책노선의 대폭적인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기민당 출신의 키징거 총리는 연정파트너인 빌리 브란트 외무장관의 영향을 받아 할슈타인 원칙의 포기, 오더-나이세 국경선의 인정, 동독의 사실상 승인 등 일부정책 노선을 수정했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대폭적 변화요구를 외면한 채 서방 중심 외교노선, 서독의 유일대표성 및 서독 주도하의 통일원칙 등 기본적 정책노선을 고수함으로써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민당이 1969년 10월 대연정을 파기하고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함으로써 기민당은 건국 후 처음으로 사민당에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1969.9~1974.5)


젊은 세대의 변화 욕구를 발판으로 집권한 브란트 총리는 ‘접근을 통한 변화’를 표방하면서 동독은 물론 소련·동유럽권 과의 적극적 접촉을 추진했으며, 특히 동독과는 ‘1민족 2국가’를 표방하면서 대등한 입장에서 회담할 것을 제의했다.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은 현실적으로 통일이 불가능하므로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증진하여 ‘사실상의 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으로 통일정책이라기 보다는 ‘분단의 평화적 관리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브란트의 대소 관계개선 노력과 동독에 대한 적극적 제의를 계기로 1970년 3월과 5월 2차에 걸쳐 동서독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그해 8월 이후 소련, 폴란드, 체코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일련의 ‘동방조약’을 체결했다. 이어서 1972년 12월 동독과 동서독 기본조약을 비롯한 각종 교류·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1973년 9월에는 동서독이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 모든 분야에서 동독과의 교류와 협력이 대폭 확대되었다. 그러나 1974년 5월 브란트 총리의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의 스파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브란트 총리가 사임함으로써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다시 한 번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실용주의 노선(1974.5~1982.10)


브란트에 이어 집권한 사민당의 슈미트 총리는 브란트의 정책노선을 계승하면서도 브란트에 비해 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슈미트 총리는 동·서간의 데탕트 및 유럽통합 분위기에 편승하여 서방과 소련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추진하려 했으나, 1979년을 전후하여 데탕트 분위기가 퇴조하고 동·서 진영 간에 긴장이 고조됨으로써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5년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 CSCE) 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을 계기로 서구에서는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1979년 12월 12일 NATO가 소련 중거리 핵미사일의 유럽배치에 대응하여 이른바 “NATO의 이중결정”을 한데 이어 12월 27일에는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 동·서간의 긴장이 대폭 고조됨으로써 슈미트 정부가 브란트의 대외정책 노선을 그대로 계승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서독정부는 서독 독자외교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고, 슈미트 정부는 새로운 정책의 개발보다는 기존정책의 성과관리에 치중하는 ‘위기관리자’의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헬무트 콜 총리의 통일실현 시기(1982.8~1998.10)


헬무트 콜 정부는 사민당의 연정파트너인 자민당이 사민당과의 불화로 연정파트너를 기민당으로 바꿈에 따라 13년 만에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사회당 정권의 성과 없는 긴장완화 정책과 사회보장 혜택의 축소문제를 둘러싸고 사민당과 자민당 간의 정책노선에 차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콜 정부는 이른바 “서방과의 협력에 바탕을 둔 동방과의 협력”을 표방하면서 아데나워 초대총리의 ‘자석 이론’과 ‘힘을 통한 변화’ 정책으로 회귀했다. 그러나 콜 총리는 사민당의 브란트 정부와 슈미트 정부가 이룩한 신동방정책의 업적을 그대로 계승하여 소련 및 동독과의 협력관계를 계속 확대해 나갔다. 대다수 국민들이 동독과의 활발한 교류·협력 관계가 그대로 지속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또 1985년 집권한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 동·서간의 화해 분위기가 다시 조성된 데다 동유럽에서 자유화·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어 이들 여건의 변화를 적극 활용할 필요도 있었다.


콜 정부는 1983년과 1984년 두 번에 걸쳐 동독에 19억 5천만 마르크의 현금차관을 제공하고 1987년에는 동독 호네커 서기장의 서독방문을 초청, 동서독 간에 화해·협력 분위기가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그해 말까지 46만 여명의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하자, 콜 정부는 사민당과 각 주정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독 탈출자를 전원 수용하는 한편, 동독 공산정권의 「국가연합 통일방안」과 경제원조 요구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동독혁명을 통일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