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남북통일 여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①

독일통일에 2차 대전 전승국들의 동의가 왜 필요했나? 1949년 동·서독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독일통일 시까지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1952년 독일조약에 따라 독일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2차 대전 전승국들의 동의를 받도록 되어 있었고, 서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의 점령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독의 경우


서독은 1949년 9월 21일 건국 후에도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서독 건국에 앞서 9월 15일 연합국이 발표한 ‘점령조례’에 따라 미국·영국·프랑스가 독일 내에서의 군대의 유지, 외교정책, 배상, 군축 등의 문제에 대한 통제권과 서독정부가 제정한 법률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대 아데나워 정부는 완전한 주권회복을 대외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고 연합국 측과 교섭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52년 5월 26일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서독과 서방 3개국 간의 관계에 관한 「독일조약」(Deutschland Vertrag)이 체결되어 연합국의 점령상태가 종료되고 서독은 대부분의 주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 조약에서는 미국·영국·프랑스 군대의 독일 주둔 권리를 인정하고 “전체로서의 독일과 베를린에 대해서는 2차 대전 전승국가들이 책임과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어 독일이 통일될 경우 이들 3개국의 동의를 받도록 되었으며, 서베를린 지역은 미국·영국·프랑스 군대의 점령통치 하에 있어 서독정부의 주권이 미치지 못했다. 더욱이 서베를린 지역에는 미군 6000명, 영국군 3500명, 프랑스군 3000명 등 총 1만 2500명의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이들 국가의 승인이 없는 한 독일통일은 불가능했다.


동독의 경우


동독도 형식상으로는 건국과 더불어 소련군으로부터 완전한 주권을 이양 받았으나, 실제로는 소련의 위성국가여서 독립적인 주권행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군사동맹 기구인 바르샤바조약기구(WTO: Warsaw Treaty Organization) 규정에 따라 동독 내 통합사령부의 설치와 소련군의 회원국 영토 주둔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독 내에는 38만 명의 소련군과 16만 명의 군무원 및 가족 등 총 54만 여명의 소련 군사요원이 주둔하고 있어 소련의 동의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동서독이 통일에 합의한다 하더라고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이러한 상황은 평소에도 동·서독 정부의 대외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요소가 되었다.


그럼 독일과 한반도의 통일여건 상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독일과 한반도는 강대국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단되었다는 점과 냉전으로 분단이 고착화 되었다는 점에서는 분단배경이 비슷하다. 그러나 분단의 배경, 분단의 수준, 분단환경이 달라 통일여건에도 차이가 많다.


➀ 독일통일을 위해서는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가 필요했다.


독일은 1952년 독일조약에 따라 통일을 위해서는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가 필요했으나 한반도의 통일에는 이러한 외부적, 법적 장애요인이 없다. 따라서 독일은 통일과정에서 주변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으나, 남북한의 경우 주변국들의 태도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는 독일과는 달리 남·북한 정부가 합의한다면 주변국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통일이 가능하다. 


➁ 통일국가로서의 역사와 연륜이 다르다.


독일은 1871년 비스마르크의 통일 이후 불과 74년간의 통일국가 역사를 갖고 있었으나, 한민족은 676년 삼국통일 이후 1269년 동안 통일국가로 존속해 왔다. 또 독일은 동일한 혈통과 문화를 가진 오스트리아와 별개의 국가로 나누어져 있으나, 한민족은 1269년간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독일에 비해 민족의식이 훨씬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독일은 분단 이후 민족의 이질화와 독일민족의 정체성 상실을 매우 우려해 왔으나 한민족의 경우 독일에 비해 그런 우려가 적다고 볼 수 있다.


➂ 동·서독은 통일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독일의 경우, 서독은 통일을 기본법(헌법) 상의 명제로 설정한 반면, 동독은 서독과는 별개의 ‘사회주의 독일국가’ 또는 ‘사회주의 독일민족’ 건설을 국가목표로 하고 있어 통일에 대한 입장이 전혀 달랐다. 따라서 서독은 동독주민들이 독일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같은 민족으로서 유대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정책목표였다. 브란트의 동방정책 설계자인 에곤 바가 “나쁜 관계라도 없는 관계보다는 낫다”고 얘기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남북한의 경우 양측이 모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입장이므로 ‘관계지속’ 자체 보다는 ‘좋은 관계의 유지’가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➃ 상호간의 적대감 수준이 다르다.


동서독은 서로 간에 전쟁을 겪지 않았고, 군사적인 대결도 동·서 진영 간 대결의 양상을 띠고 있어 상호간에 적대감이 높지 않았으며, 특히 동서독 주민 간에는 적대감이 전혀 없었다. 남북한의 경우 6·25 전쟁을 겪은 데다 1953년 휴전 이후에도 양측의 철저한 이념교육과 북한의 계속된 도발로 남북한 정부는 물론 남북한 주민 간에도 불신과 적대감이 높다. 따라서 통일합의 과정은 물론, 통일 후 체제통합 과정에서도 독일보다 훨씬 큰 진통과 갈등을 겪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