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獨 교회처럼 北내부서 민주화 지원할 세력은?

통일 전 동독 교회는 북한의 교회가 공산당의 하부조직이 되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끊임없이 당을 상대로 갈등과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가운데 동독 교회는 마지막까지 교회의 본질을 지켜냈고, 공산당의 반(反)민주적 행태에 도전했다. 물론 동독 40년의 역사 속에서 공산당의 탄압과 회유로 교세가 기울긴 했지만 역사의 현장 속에서 끊임없이 기독교 정신을 지켜온 것은 본받을 만하다. 이것은 동독사회의 기독교 전통과 함께 서독 정부와 교회의 끊임없는 관심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서독의 실체는 동독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됐고, 동독이 헌법에 “교회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동일한 권한을 갖는다”고 규정한 것도 이를 의식한 결과였다. 따라서 동독의 교회 탄압은 매우 은밀하게 추진됐다. 헌법에 교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는 마르크스주의에 동화돼 소멸돼야 한다는 내부원칙을 정해 암암리에 이를 추진해갔다. 1954년에는 유겐트바이에라고 하는 당 청소년 서약식을 도입해 이를 입교세례의 대안으로 제도화함으로써 청소년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았고, 1961년에는 공무원과 경찰, 군인 등 국가공직자들에게 교회 탈퇴를 강요했다.

이런 공산당의 교회 탄압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동독 교회는 당의 비민주적 행태를 비판했다. 이미 1949년 동독 건국 직후 치러진 부정선거에 대해 당시 카톨릭의 디벨리우스 주교는 “전통적 권위를 계승하고 국민의 신뢰를 누리려는 정권은 부정선거와 같은 왜곡된 역사는 만들지 않는다”며 정면 대응을 했다. 당과 교회의 갈등은 심화됐고, 1952년에는 당 전당대회에서 반교회정책을 발표했다. 이에 교회는 공산당이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고 반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독 사회를 뒤흔들었던 1953년 노동자 봉기는 교회의 입지를 강화해줬고, 교회에 대한 공산당의 회유와 함께 소위 ‘사회주의 내의 교회’라는 타협안이 자리를 잡았다. 즉 당은 교회의 독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하고 교회는 사회주의를 완전 배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회주의 국가 속에서 교회의 존재를 인정받게 된 셈이다. 특히 1983년 루터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를 맞아 이뤄진 전 세계 교지도자들의 동독 방문은 기독교적 가치의 독립성을 알리는 계기가 돼 동독인들의 민주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교회는 동독 주민들의 ‘인권 변호사’ 역할도 했다. 동독 교회의 또 하나의 의미는 소위 ‘인권 변호사’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다. 동독의 반체제 인사와 정치범들이 마지막으로 찾던 곳도 바로 교회였다. 서독 정부는 동독 교회를 지원해왔던 서독 교회의 도움을 얻어 암암리에 이들을 서독으로 이주시켜 왔다. 1명 당 평균 9만 마르크(한화 약 5천만 원)를 지불해 총 3만 3,755명의 정치범을 석방시키고 이들을 서독에 이주시킨 것은 세계사에 영원히 기억될 사건이다.

이런 서독의 관심과 배려 속에서 동독의 민주인사들은 온갖 탄압 속에서도 교회에서 안식을 찾았고, 민주화의 불씨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981년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를 위한 촛불기도 운동은 ‘월요데모’로 발전해 공산당의 퇴진을 요구하는 통일의 발판이 됐다. 서독의 콜 총리는 이런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통일의 가능성을 봤다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