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초석을 연 서독 이산가족 정책의 교훈

통일 전 서독정부가 추진했던 이산가족 정책의 특징은 ‘원칙’과 ‘실용성’이었다. 이는 언젠가 양 국가가 재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기본법 정신에서 기인했다. 이 정책의 주 대상은 동독 탈출자와 해외 이주자들이었고, 이들은 서독 정부의 각종 배려속에서 서독으로 이주해왔다.

서독에서는 탈출한 동독 주민들을 위한 ‘연방귀순자수용법’이 제정됐고, 해외이주자들은 혈통주의에 근거해 모두 수용됐다. 헌법에 해당하는 서독기본법(Grundgesetz) 제116조는 정치적 희생양이 돼 독일을 떠나야 했던 교포나 후손들에게 독일 국적을 부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독일 혈통은 이 법에 근거해 독일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고, ‘동독 귀순자’와 같은 유리한 보호 대책을 마련해 서독 내 적응을 도왔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이외에도 서독 국민들은 구소련을 중심으로 동부 및 중부 유럽에 흩어져 살고 있던 독일계 사람들에게 도덕적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이 오랜 세월에 걸쳐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고, 패전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 온 이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19세기 중반부터 유럽대륙에 싹튼 민족주의로 큰 고통을 받아왔다.

분단된 채 동독에 거주하던 주민들에 대한 수용과 보호대책은 국가의 자국민 보호와 자유, 인권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차원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하에서 단순한 금전적 혜택보다는 서독의 사회보장체제에 이들을 수용하고 자립해 살아가도록 하는 조치들을 마련해줬다.

이에 따라 자유를 갈망하며 고향을 떠난 동독인들은 서독 정부에 의해 보호되고 수용됐다. 1949년 분단 첫 해부터 동독인 13만 명이 서독에 이주했고, 61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까지 매년 평균 20여만 명이 서독으로 귀환했다. 이들에게는 저소득층에게 주어지는 사회주택이 우선적으로 제공됐고, 동독에서 다니던 직장의 보수에 걸맞은 실업수당이 지급됐다. 그리고 동독에 남겨둔 재산에 대한 보상금 명목으로 1800마르크가 지급됐고, 그 외에도 임대비 지원 및 각종 세제지원이 이뤄졌다.

특히 동독에 억류돼 있던 양심적 정치범들에 대한 서독정부의 배려는 서독사회가 자유의 가치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며 체제와 관련된 고통에 얼마나 적극 개입했는가를 잘 설명해주는 일이었다. 서독 정부는 이들 정치범들을 위해 총 34억 마르크(한화 1조 8천억원)를 지불했고, 1963년부터 1989년까지 총 3만 3577명의 양심수들을 석방시켜 서독에 이주시켰다.

이에 반해 동독 정부는 이러한 상호방문의 기회를 외화벌이의 수단으로만 활용했다. 우선 동독 방문자들에게 40마르크에 해당하는 현금을 가치가 낮은 동독 마르크와 1대 1로 의무 교환토록 했고, 동독인들의 서독 방문은 매우 선별적으로 허가했다. 국제적으로는 자유로운 서독 방문을 표방했지만, 실제로 서독방문은 제한된 계층에 한해서만 이뤄졌다. 60세 이상의 노인이나 병약자들이 주요 방문객이었고 동독 정권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서독에 정착해 줄 것을 바라는 변칙적 이주를 조장해왔다. 동독의 부담을 서독에 안기려는 의도였으나 서독사회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해마다 1, 2만 명의 노약자들이 서독을 방문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서독에서 연금을 받고 생활했다.

이렇듯 원칙에 충실하며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만큼의 부(富)를 나눌 수 있었던 서독사회의 단호함과 절제야말로 독일통일의 초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