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 주민 신뢰받는 통일의 리더십 가진 정치인 있나

동서독 분단시절 통일에 대한 서독사회의 반응은 이중적이었다. 통일 직전 조사한 설문에서는 통일의 당위를 묻는 질문에는 95% 이상이 동의한 반면, 통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리라고 믿는 국민은 5% 미만이었다.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도 통일은 먼 훗날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로 독일 통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가능하지 않을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동독 탈출자들이 생겨나고 헝가리 국경이 열리며, 베를린 장벽이 철거됐다. 꿈에서나 그리던 통일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독일 국민에게 엄청난 물질적 희생을 강요했다. 우리나라 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1,500억 마르크가 매년 통일 후 나타나는 혼란과 부작용을 처리하기 위해 투입됐다.

자연히 정부의 세수증가 조치가 뒤따랐고, 소득세율 및 국민생활과 밀접한 생필품이나 에너지 가격도 급격히 인상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중 휘발유 가격의 폭등은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가장 큰 희생 중 하나였다. 리터 당 1마르크에 불과하던 휘발유 값이 1마르크 50페니히로 50퍼센트나 인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충격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서독 국민의 반응은 비교적 차분했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국민들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독 정치인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젊은 시절부터 뜻을 키우며 정치인으로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정치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청년시절부터 해당 지역의 정당 프로그램에 참여해 리더십을 훈련하고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정치인이 되기 위해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특히 도덕성은 정치인들이 갖춰야 할 제일의 덕목이다. 어찌 보면 덕목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독일 사회는 도덕적으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장관의 임기가 일반적으로 정권의 임기와 동일하며, 사후 책임을 묻는 청문회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가운데 서독인들은 분단 극복에 필요한 기금이 절대로 개인적으로나 혹은 왜곡돼 사용되지 않는다고 신뢰했던 것이다.

둘째, 통일 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통일방안을 놓고 여야 간 논쟁이 시작됐다. 당시 여당이었던 기독연합당은 서독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 23조에 근거한 통일 방안을 제시했다. 146조는 23조와는 달리, 동서독을 각각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두 국가가 협상을 벌여 통일 헌법을 만들고 이를 기초로 통일을 이뤄가는 주장이다.

이 논쟁은 “우리에게 서독의 마르크화를 달라, 아니면 우리가 직접 서독 마르크화를 찾아가겠다”는 동독 국민들의 절규로 일단락됐다. 즉 자유와 풍요로움을 동경해왔던 동독 국민들이 서독 체제로의 편입을 원함에 따라 23조의 통일 방안이 국민적 합의안으로 채택됐던 것이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인이 서독 국민으로 하여금 통일 후 50%에 달하는 휘발유 가격인상을 부담토록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산가족, 탈북자, 금강산 관광 등 대북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성급한 결과를 기대하기 보다는, 과정 속에서 국민의 신뢰와 합의를 이뤄내며 통일의 과제를 이뤄나가는 지혜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