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세력, ‘김기종 테러’ 계기로 자기성찰해야

김기종은 미국대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경찰은 김기종이 대사를 발견하자마자 공격한 점, 팔이 관통될 정도로 강하게 찔렀다는 점 등을 들어 고의적인 살인 행위로 판단하고 있다. 김기종은 왜 미국대사를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 무엇이 김기종으로 하여금 미국대사를 향해 살인의 칼날을 휘두르게 만들었을까?


현재까지 밝혀진 김기종의 범행동기는 한마디로 반미감정과 반미주의다. 김기종은 경찰조사에서 ‘리퍼트 대사가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범행대상으로 삼았다’고 진술했다. 그의 과거행적도 주로 반미 통일 활동이 차지하고 있다.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북한에 다녀왔다. 2011년 12월에는 김정일 분향소 설치를 시도한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2013년 이후에는 이른바 이석기 RO(혁명조직) 인사들과 통합진보당, 이적단체인 범민련 남측본부 등이 소속된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이 주최한 기자회견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김기종은 범행 후에도 자신이 철저한 반미 친북주의자임을 숨기지 않았다. 리퍼트 대사의 얼굴을 칼로 찌른 직후, ‘한미연합훈련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북한정권의 주장과 유사하다. 경찰 진술에서는 ‘우리나라는 미국에 예속된 반식민지 사회이고, 북한은 자주적인 정권이라고 생각한다’고 진술했다. 결국, 김기종이 미국대사를 향해 살인의 칼날을 휘두르게 만든 것은 반미친북민족주의 이념이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널리 유행했던 반미친북민족주의 이념이 김기종의 의식에도 뿌려졌고, 그때 뿌려진 이념의 씨앗이 수십 년이 지나, 주한 미대사를 향한 정치테러로 꽃을 피운 셈이다.


1995년 12월 김기종은 숭실대학교 통일정책대학원에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제목은 ‘남한사회 통일문화운동의 과제’였다. 반미민족주의 이념과 그 이념에서 비롯된 자주, 민주, 통일 운동이 김기종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김기종이 왜 극단적인 반미친북주의자가 됐는지, 그 단서를 보여주는 논문이다.


첫째, 논문은 ‘통일문화운동’을 ‘남한사회변혁의 역사적 상황과정에서 시도된 사회운동의 한 단면’으로 규정하고, ‘분단의 극복을 위한 남한 사회에서의 정치사회적 노력, 즉 자주와 민주 그리고 통일을 위한 제반 움직임을 문화운동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둘째, ‘통일문화의 내용은 분단에 기초한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극복하기 위한 자주적 민족문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셋째, 통일을 위한 예술운동의 실천 방향에 하나로 ‘민중의 자주적 교류를 가로막는 정치권력과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상황에서는 공연을 통한 교류나 북한연극의 이해를 추가하기 보다는 그를 가로막는 권력과 국가보안법, 반북한 이데올로기(반공 안보) 등 제반장치들과의 투쟁에 복무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당시 대학가에 유행하던 이념적 반미, 친북통일운동을 강조하고 있다.


논문의 논리전개가 방만해 저자가 통일문화운동론의 사상이념적 기초를 간결하게 정리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1980년대 학생운동에 널리 퍼져있던 한국사회변혁운동론, 이른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뼈대로 통일문화운동의 내용과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사회의 모든 모순은 분단에서 비롯된 것이며, 남과 북이 분단된 것은 미제국주의가 한국사회를 점령했기 때문이며, 북한은 미제국주의에 맞서 노동자 농민이 주인된 자주국가를 건설해 놓았으며, 우리 민족인 북한과 함께 미제국주의를 몰아내야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반도 통일이 실현될 수 있다’는 식의 80년대 주사파 학생운동의 반미친북민족주의 이념(또는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이 김기종의 논문 곳곳에 스며있다.


진보와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1980년대 이념에 대한 진지하고 철저한 자기반성 없이 21세기로 넘어 왔다. 그들 가운데 하나였던 김기종은 끝내 극단적인 이념테러를 자행하고 말았다. 이번 사건이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의 성찰과 혁신의 계기가 되어, 앞으로 제2, 제3의 김기종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