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南정조준’ 최악 시나리오, 우리의 해법은 무엇인가

역사상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유로 전쟁이 발발한 적은 없다. 고대 호머의 이야기도 고작 왕의 여자를 가로채간 옆 나라 왕자를 징벌하기 위해 국가가 나선 원정기 아닌가! 근대에 들어 전쟁의 수행방식은 더욱 정교해졌지만 전쟁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인류사의 궤적을 벗어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쟁의 발발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인간 심리의 차원에서 야기되는 변수가 크게 작용한다. 체제와 제도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과 절차의 보호장치가 자동발생적인 계량적 판단으로 전쟁을 명령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인간의 질적인 판단, 즉 가치의 문제가 국가를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그러나 최후의 합리성을 가진 전쟁으로 몰아가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다. 그렇기에 전쟁은 목숨을 건 가치의 극단적인 충돌인 것이다.

체제가 내재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기의 구성원의 생명을 담보로 내건 가장 비싼 체제안전망인 셈이다. 그렇기에 과연 ‘정의로운 전쟁’이 가능하냐는 질문은 오랜 철학적 주제이기도 했다.

타협과 양보, 희생과 조화라는 인간의 도덕성이 작동할 자리를 제거하고 완벽한 승리는 곧 적의 완전한 섬멸이라는 전쟁 자체의 정당성은 오직 ‘정의’를 벗어나서는 찾을 길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신의 전쟁’이란 레토릭은 그래서 여전히 매력적이다.

십자군 전쟁은 인간이 얼마나 신의 이름을 빙자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실례이기도 하다. 차라리 ‘비겁한 평화’가 낫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정치인이 버젓이 국가를 대표하는 정책결정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건 그만큼 사람은 죽음이 두렵다는 걸 방증한다.
 
개인의 피눈물을 마시며 자란 전쟁이 오늘날 세계지도를 그려냈다는 사실은 실존이 갖는 생의 준엄함을 내포한다. 심정적으로야 명예로운 죽음보다 부끄러운 생존이 더 의미 있다는 개인의 가치관이 꼭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문제는 그러한 개인의 총합이 곧 국가이어야 타당하냐는 의문이다. 전쟁의 발발은 개인사를 뛰어넘어 국가 존립 자체의 명운이 걸린 사안이라는 데 사안의 심각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것이냐의 문제는 그래서 중의적이다.

북한의 막무가내식 핵 도발을 묵과할 수 없고, 단지 북한을 벌주기 위한 게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핵 위협을 발본색원하기 위해선 핵탄두를 실은 미사일이 태평양을 건너기 전에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대중적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설령 북한의 진심이 절대 미국을 상대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려는 의도가 좁쌀만큼도 없다 해도 말이다.

냉정히 따져보면 과연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이라도 할 수 있는 상태인가 따져봐야 한다. 군사전문가가 아니라도 답은 쉽게 안다. 아이가 총을 쥐고 흔든다고 그 아이를 현장에서 사살하는 어른은 정당방위로 면책되지 않는다.

북한의 핵 미사일이 정말 미국을 향해 날아오르는 순간, 북한이란 존재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도 없다. 그런 짓을 왜 김정은이 벌이겠냐는 의문은 합리적이다. 멋있게 죽으려고 살아가는 독재자는 없다.

김정은의 최종 타깃은 트럼프가 아닐 것이란 신중한 의심이 보다 상식적이다. 핵 도발의 이면에 놓인 김정은의 실제 손익계산서를 따져봐야 하는 이유다. 진짜 복잡한 문제는 미국이 북한의 핵 시설을 어느 날 전격적으로 폭격한다면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지금 남한의 외교안보 정책의 방향이 절대 그런 일을 (미국이)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거라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 일단 다 좋다고 치자. 그렇다면 북한이 핵 위협으로 얻고자 하는 최종결과물은 단지 북한 내부용이라는 일각의 해석이 정답일까?

한국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뜬금없이 보이는 촛불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은 좋게 말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단면이라고 봐줄 수도 있다. 미국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변방의 힘센 나라를 끌어 들이는 것. 관여(engagement)정책이란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외면하고 싶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북핵이 실은 남한을 정조준 했다는 걸 어느 날 인정해야 할 순간이다. 그 때 한국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차라리 적당히 ‘순치된’ 적화통일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게 낫겠다는 대중적 여론이 형성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는가?

안보정책만큼은 결코 대중의 여론을 따라가서는 안 되는 절대적 이유다. 구성원의 과반수가 피를 흘릴 지언 정 그 체제가 성립 당시 정초한 가치는 정치적인 타협의 산물이 될 수 없다. 이것을 깬 사회는 어떤 형태든 멸망했음을 현대사는 보여준다.

가치에 관한 암묵적인 사회적 공감대는 죽어야 끝나는 ‘피의 맹세’와도 같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것을 지킬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질문지 앞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 언제나 심판은 도적처럼 임하는 법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