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반발 中에 이용당하는 학자·국회의원 바라보며…

언론의 자유는 편집권(보도권)의 독립을 생명으로 한다. 편집권의 독립이란 사주(社主)나 자본(광고)로부터의 독립성은 물론이지만,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에서 권위와 신뢰를 인정받는다. 민주주의란 그래서 (독자의) ‘알 권리’와 (독자에게) ‘알릴 권리’로 작동한다. 한국의 짧은 민주주의 역사는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의 기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중국에도 ‘언론’이 존재할까? 물론 언론사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 ‘진짜 언론’이 있냐는 말이다. 전부 관제언론, 어용언론이다. ‘관제’란 다름아닌 정부의 통제, 지휘감독의 부산물이란 의미다. ‘어용’은 정부만을 위한 봉사기구란 뜻을 내포한다.

중국 정부란 중국 공산당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국가적 기구에 불과하다. 중국 공산당은 북한 조선노동당의 산파다. ‘초록이 동색’이란 의미다. 1당 독재건, 9명의 집단 독재건 동일한 독재다. 이런 체제 아래 언론은 절대 독립적일 수 없다. 인민일보와 노동신문의 차이는 지면과 다루는 주제의 양적(量的) 차이가 전부다.

따라서 중국의 어용언론이 쏟아내는 기사란 중국 공산당의 외교적 수단일 뿐이다. 중국 언론의 다양성이란 매체의 가치관을 달리하는 질적 다양성이 아니라 다양한 ‘농도’로 중국 공산당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국가기관인 것이다. 따라서 중국 매체의 논조란 중국 정부, 그 머리에 해당하는 중국 공산당의 가치와 철학, 이해관계의 다양한 통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설마 이 설명이 새로운가? 고작 상식적인 말이다. 그런데 이것도 언론이라고 자발적으로 기꺼이 ‘이용’당하고자 손들고 나선 자들의 ‘저의’는 무엇일까? 솔직히 중국이라고 남한의 사드 배치를 ‘수긍’하는 학자가 단 한 명도 없겠는가?

중국의 모든 국제정치학자가 ‘어용’은 아니다. 그래도 중국 공산당의 입장과 배치되는 발언은 단 한 건도 드러나지 않는다. 통제의 결과다. ‘철의 장막’이 무너졌다고는 하나 중국과 러시아는 여전히, 그리고 분명히 통제사회다. 정부와 공산당의 지휘와 감독은 절대적 금지선(red line)이다.

사뭇 일사불란하고 강해 보이는 통제사회가 실상은 토대가 매우 허약하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소련도 중공도 미국의 자유분방함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는 자유 속에 잉태되는 인간의 진짜 ‘창의와 헌신’을 통제된 의견과 지시된 노력이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엔 단 하나의 전제가 있다. 국가존립에 관한 한 당파성을 초월한 일관된 신념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선 국회의원만 되면 자신의 생각이 전 국민을 대표할 만큼 지식과 정보와 이해수준이 가장 뛰어나다는 착각에 빠지는 모양이다. TV 앞에서 A매치 축구경기를 보는 전국민이 국대 감독이 되는 것 마냥 말이다. 그런데 안보는 축구가 아니다.

현 정부의 무능함이 고도의 안보적 결단마저 ‘중우(衆愚)정치’의 산물로 만들었다면, 베이징에 직접 가서 ‘중국의 소리’를 듣겠다는 야당 의원들은 호랑이 굴속으로 ‘자청’하는 여섯 마리 토끼다. 마치 생존의 토양이 ‘사대 중화주의’에 있음을 선포하려는 모양새다. 이렇고도 한국이 이만한 대접을 받는 게 얼마나 갈지 참 조마조마한 세월을 살고 있다. 분에 넘친다 싶은 꼴은 언제고 엎어지게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