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反체제조직 ‘우리들의 투쟁’ 최후

▲ 지난해 함남 단천역 부근에 나붙은 김정일 비난 벽보 <후지TV방송 캡쳐>

탈북자 출신인 필자는 국내에 입국한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북한에서는 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으면서도 데모 한 번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럴 때 마다 “북한 주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너무 심해 감히 들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북한에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그 속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반체제 활동을 해서 자신만 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 전체가 수용소로 끌려가서 평생 동물처럼 학대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면, 이는 용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폭압적인 조건에서도 북한 독재체제에 분연히 항거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재직할 당시에 체제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찾아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 학생들에게 “아직 때가 아니다”며 만류했던 사실을 털어놓기도 했다.

필자도 1989년에 평양에서 이뤄진 북한 청년들의 반체제 활동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그들이 뿌린 삐라와 벽보를 보고 당황했던 평양 주민들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주민들은 벽보를 보고도 떼지 않음으로서 이들에게 암묵적인 동의를 표시했다.

이들은 북한 김일성 김정일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봉건왕조 체제라고 성토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진정한 사회주의를 달라고 외쳤다. 그들은 체포돼 모두 사형 당했지만 역사는 이들을 기록할 것이라 믿고 사건의 전말을 미리 알리고자 한다.

호응하는 평양의 민심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끝난 1989년 9월 어느날 아침 락랑구역 영화관(현재 평양시 락랑구역 통일 2동 소재)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출근길에 나서던 사람들은 영화관 전면 곳곳에 “우리들의 투쟁”이라는 제목을 단 수많은 벽보를 보고 있었다.

벽보의 내용은 이랬다. ‘지금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신과 어긋나는 봉건통치 국가일뿐이다. 인민들에게는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을 강요하면서 김일성과 간부들만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다. 우리는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원한다.’ 그리고 명의는 ‘우리들의 투쟁’으로 돼있었다.

이들은 북한 체제를 비판할 때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의 구절을 인용했다. 마르크스 저작집을 인용해 북한 정치권력이 프로레타리아 정권이 아닌 김부자의 개인왕조라고 비난했다. 삐라의 마지막에 이들은 ‘이 봉건 통치국가를 우리 손으로 뒤집어 새 사회를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이것을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이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다음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이를 훼손하지 않았다. 출근하던 많은 평양 시민들이 보라는 무언의 동조였다. 물론 괜히 손댔다가 복잡한 일에 연루될 수 도 있다는 심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쳐다만 보고 떼어내지 않은 것은 그 주장에 동조하는 심리도 컸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평양시가 발칵 뒤집혔다. 국가보위부는 즉시 ‘반동’들을 체포하라고 평양시 보위부에 명령했다. 시 보위부가 벽보 부착자를 찾기 위해 수사에 착수했다.

보위부가 수사에 착수했지만 이들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확산됐다. 이들은 평양시내 전체 영화관과 극장을 돌면서 반정부 삐라를 부착했다.

인쇄기로 제작된 반체제 벽보

이들의 삐라 부착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귀신도 모르게 야밤에 나타나 영화관 벽에 벽보를 부치고 사라졌다. 또한 그동안 반체제 삐라가 대부분 자필로 작성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인쇄기로 제작됐다. 즉, 유인물(油印物)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단체명을 ‘우리들의 투쟁’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보위부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이들 뒤를 쫒기에 바빴다. 삐라는 하루는 대동문영화관, 다음날은 선교영화관, 또 그 다음날은 동평양대극장에 붙었다. 평양이 이들 때문에 난리가 났다.

간첩이 붙이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평양 시민들은 내부 소행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신출귀몰한 활동도 몇 가지 단서를 제공했다. 개인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인쇄기를 이용했다는 것과 마르크스 서적을 인용했다는 점을 착안해 보위부는 이 부분을 집중 수사했다.

평양시내에 있는 인쇄기를 모두 조사해 똑 같은 활자본을 사용하는 곳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인쇄기는 기계에 따라 미세한 글자 모양의 차이가 있다. 인민대학습당에 있는 마르크스와 레닌, 엥겔스의 저작들은 허용된 사람만 볼 수 있는데 이를 열람한 사람들을 집중 추적 조사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반체제 활동 청년들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위부는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과 평양외국대학, 평양상업대학, 평양건설건재대학 등의 학생들이 연루됐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삐라의 글자들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김책공대와 몇 개 대학의 인쇄소의 활자와 똑같다는 점을 확인했고, 마르크스 서적을 열람한 대상이 대부분 대학생이나 교수, 연구자들이었기 때문에 젊은 학생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망을 좁혀 간 것이다.

▲ 평양국제영화회관

대동강구역 보위원에게 체포당해

그러나 인쇄기를 몰래 사용해 그 흔적이 없는 데다, 책을 열람한 대상들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검거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평양시 보위부의 반탐과와 수사과, 각 구역의 보위원들은 주야로 모든 극장과 영화관에 잠복근무를 섰다. 결국 이 과정에 90년 8월 어느 날 새벽 대동강영화관에서 삐라를 붙이던 학생이 잠복 중이던 대동강구역 보위부 보위원에게 붙잡히게 됐다.

체포된 학생을 조사하던 평양시 보위부는 조직의 실체를 접하고 모두 놀라고 말았다. 반체제 활동을 한 학생들의 아버지들이 대부분 전직 북한군 장령(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

보위부는 반체제 조직에 연루된 학생 12명을 체포했다. 연루된 학생들은 전부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외국어대학, 평양상업대학, 평양건설건재대학 등 북한 최고의 엘리트 대학의 상급학년(3학년 이상) 학생들이었다.

이들 12명 중 8명은 모두 전직 북한군 장령(장군·소장이상)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대학에서도 우수한 성적과 모범적인 대학생활로 교수들과 동창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장령인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어릴 때부터 최고 대우를 받으며 부러운 것 없이 자랐다. 이렇게 성장한 그들은 고등중학교 시절부터 수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북한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다.

마르크스 서적보고 ‘사회주의 아니다’ 결론

그들이 북한정권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장령들만 사는 고급아파트에서 나오게 되면서 평양 일반 주민들의 세상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평양에는 북한군 장령을 위한 고급 아파트가 있다. 일반인들의 접근이 금지된 아파트에는 24시간 군인이 경비를 서고 방문이 허락된 사람만이 아파트단지로 들어갈 수 있다.

체포된 학생들은 아버지의 제대(예편)로 장령아파트에서 나와 일반인들과 똑같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서민들이 겪는 생활고를 직접 체험하면서 체제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특별 대우를 받으며 중앙당 간부 자제들과 장령 자제들과만 어울렸던 이들은 일반아파트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평양시민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사회가 특권층에게만 이로운 사회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청년들은 마르크스와 레닌, 엥겔스 저작들을 돌려 읽으면서 북한사회가 노동자, 농민을 위한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청년들은 장령아파트에서 함께 자라며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아버지의 제대 후 함께 어려운 생활을 겪고, 마르크스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뜻이 맞아 ‘우리들의 투쟁’이라는 반정부 단체를 결성했다.

북한은 60년대 이후 마르크스와 레닌을 비롯한 유명한 사회주의 혁명이론가들의 저서들을 모두 회수하여 일반인들이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인민대학습당에는 이 책들을 열람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관계당국의 특별한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체포된 학생들은 아버지의 배경으로 이 책들을 볼 수 있었다.

체포 후에도 기개 꺾이지 않아

이들은 단체의 최종목표를 북한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에 중심을 두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첫 활동으로 뜻이 같은 동지들을 찾아 조직을 늘여 나가고, 민심을 돌려세우기 위한 활동으로 벽보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첫 벽보 투쟁 이후 1년간 은밀히 활동했던 그들은 결국 체포됐지만, 보위부 조사를 받으면서도 그 기개가 꺾이지 않았다고 한다. 비상한 두뇌와 북한최고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들은 보위부의 심문에 정연한 논리로 떳떳하게 맞섰다.

한 예심원(수사관)은 “오히려 예심원들이 이들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털어놨다.

당시 그들의 심문에 관여했던 한 보위원은 “만약 그들이 발각되지 않고 세력이 확대돼 커졌다면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 보위원은 그들이 비밀리에 평양시 교외의 비밀장소에서 사형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정말 아까운 인재들이 죽고 말았다고 고뇌어린 표정을 지었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 청년들은 비록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김정일의 총탄에 사라졌지만, 그들의 뒤를 이은 수많은 젊은 투사들이 북한 내에서 민주주의를 목 놓아 부르고 있을 것이다. 또한 오늘도 평양시 보위부 지하 감옥에서는 북한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다 체포된 북한 청년들의 비명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