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권력 주요변수 김경희의 ‘사랑과 욕망’

북한의 젊은 독재자 김정은이 의지하는 유일한 친족은 김경희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김정일은 친동생 김경희에게만 권력 진출을 허용했다. 삼촌 김영주와 계모 김성애, 의붓동생 김평일 등은 곁가지로 분류해 권력에서 철저히 소외시켰다.


김정일은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김정은의 초기 집권 안정화를 위해 고모 김경희, 고모부 장성택,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리영호 총참모장을 최측근으로 선정했다. 이 가운데 리영호가 지난해 숙청당해 중도 탈락했다.


여기서 필자가 가장 잘 아는 인물은 김경희다. 북한 밖에서는 김경희가 여자이고, 과거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을 앓았으며, 건강도 좋지 않아 정치적 무게감이 다른 사람에 비해 떨어진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실이다. 여러모로 봐도 김경희가 북한의 실권을 잡는 시나리오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정치적 조력자로서 누구를 지원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적잖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장성택, 김경희, 최룡해 세 사람 모두 김정은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고, 정치적 기반이 튼튼하며 야심 또한 만만치 않다. 이 가운데 김정은과 가장 격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김경희다. 아무리 충신이라고 해도 백두혈통을 이어받았느냐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김정일이 아들 김정은에게 유언으로 강조한 말 중의 하나가 ‘아무도 믿지 마라’는 것이다.


몇 년간 보지 않은 형제나 친척도 피 때문에 끌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북한에서는 더욱 그렇고, 김 씨 일가에는 더더욱 그렇다. 한순간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권부에서 친족 관계는 큰 힘을 발휘한다. 김경희는 이런 면에서 김정은이 상대적으로 덜 경계심을 가지고 여러 조언을 들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은 제의서와 구두 보고로 김정은에게 정책을 제안하지만, 김경희는 필요한 말을 수시로 한다는 점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김경희가 변수가 되는 이유는 그녀의 욕망이 김정은에만 의지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김경희도 장성택, 최룡해 못지않게 정치적이다. 김경희가 김정은보다 김정남과 가까웠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김경희가 나이 어리고 고집이 센 김정은을 지도자로 보지 않았다. 뒷부분에 다루겠지만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있다. 지금은 김정은 눈치 때문에 좀처럼 연락하기 힘들겠지만 김정남에게 눈에 띄지 않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 친한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는 김경희가 김정은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버릴 수 있다는 말이 오간다. 김경희는 김정은 시대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장성택과 전략적으로 결합했다. 여기에는 김경희의 순탄하지 않은 가정사가 담겨 있다.


김경희는 김일성종합대학 시절 동갑내기 장성택을 쫓아다녔고, 김일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결혼에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장성택이 김경희에게 애정을 많이 쏟지 않았고, 김경희가 1975년에 자동차 사고를 당해 자궁을 적출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는 점이다. 김경희의 친딸로 2006년 프랑스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진 장금송은 김경희의 친딸이 아니다.


장성택의 혼외자식을 집에 데려와 키웠고, 김경희가 장금송을 프랑스로 강제로 유학을 보냈다. 장금송이 귀국 요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했고, 김경희는 이를 반대했다. 결국 장금송 사망은 김경희가 사주한 살인사건이라는 사실을 나는 보위부 간부에게 직접 들었다.


장성택이 김정일처럼 여자를 밝힌 인물은 아니었지만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지휘하면서 돈 맛을 알게됐고, 이후 청춘합영회사 사장에게 여러 상납을 받았다. 이 가운데 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김경희의 큰 공분을 샀고, 이 문제로 김정일에게 제기했지만 ‘여자 문제로 사내를 잡지 마라’는 핀잔만 들었다고 한다. 김경희는 수심이 깊어지면서 술독에 빠졌고, 나중에는 헤어나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여기에 우울증까지 겹쳐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1990년대 초반 병세가 깊었지만 김정일은 김경희를 찾지 않았다. 김경희는 장성택에게 가장 치명적으로 복수하는 방법으로 금송을 제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장성택은 이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김경희는 와병 중에도 중국을 방문해 김정남을 만나 위로를 받았고, 가끔 만수대 예술단 바이올리니스트 김성호와 교류했다는 소문이 있다. 장성택은 김정일 뇌졸중 발병 이후 김경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경희와 화해를 시도했고, 김경희도 권력적 판단을 통해 장성택과 화해 수순을 밟았다.


그러나 김정일에 대한 앙금은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2008년 김정일이 뇌졸중에서 회복된 이후 김경희를 자주 불러 아들 정은에 대한 부탁을 했다. 그러나 김경희는 자신이 아플 때 무관심한 김정일에게 마음을 풀지 않았고, 그 여운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이 이를 간파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장성택이 건재한 상황에서 겉으로는 충성을 다짐한 김경희의 속마음을 헤집어 봐야 한다고 주장해 화를 자초할 인물은 없을 것이다. 만약 김정은이 ‘고모가 자신이 아닌 다른 경쟁자에게 더 애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떤 대응을 하고 나설지, 그 여파가 권력의 큰 소용돌이가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장성택은 수십년 간 사실상 2인자로 군림하면서 당군정에 자기 사람을 곳곳에 심어놨다. 최룡해는 김정일과의 특수관계를 바탕으로 김정은의 최측근으로 군림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 동생 여정이 결합하는 구도가 형성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룡해가 장성택 사람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북한 내부 사정을 전혀 모르는 소리다. 두 사람은 혁명화 교육을 하게 된 배경이 바로 김정일에 대한 충성경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두 사람 사이는 매우 좋지 않고 권력적으로도 부딪힐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김경희가 건재하면 권력의 추가 쉽게 역전되지 않고 김정은의 조기 ‘장성택 제거’ 시도는 큰 역풍을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