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좋은 소설 소재로 왜 하류 ‘이념서적’을 썼을까요?

소설가 정도상이 ‘찔레꽃’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의 소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나의 고마움이 퇴색되지는 않습니다.

수백만 명이 굶어죽고, 수십만이 비참하게 이국을 떠돌며 수천만이 감옥 그 이상의 삶을 견뎌내고 있는데, 그런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조금 인정한다 하더라도 탈북자라는 ‘조국의 배신자’ 혹은 ‘낙오자’에게 들은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띄겠느냐는 정도의 치부가 좌파의 주류인 친북좌파 진영에 존재해 왔습니다.

절망스러운 일이었지요. 멱살을 쥐고 흔들며 ‘당신들이 무슨 좌파인가~!’라고 울분하는 상상으로만 통탄스런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이러했기에 정도상의 소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그리고 분노와 허탈을 불러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탈북동포들의 삶과 마주했다는 것 자체로 반가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 ‘찔레꽃’에서 정도상은 ‘충심’이라는 여성의 고난스러운 삶을 우리에게 내세워 탈북자의 삶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첫사랑에 마음 설레고 친구들과 하얀 웃음을 통통 튀겨내며 예정된 음악인의 삶을 맞이하는 평범한 함흥처녀 ‘충심’. 돼지공장에서 돼지밥을 구해오는 것으로 병든 남편을 부양하며 살아가는 엄마를 위해 두만강을 건너 돈을 벌어오려 결심하는 충심. 두만강에서야 자신이 인신매매범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심연에 떨어져 버린 충심. 몸이 팔려 헤이룽장성 조그만 시골에서 1년여를 보낸 후 탈출한 충심은 안마방 등을 전전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밑천을 악착같이 마련하지만 그마저도 조선족들에게 빼앗기고 중국 공안에 쫒기게 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충심은 한국으로 오게 되나 결국 기획입북(?)을 주선한 선교사 일당(!)에게 정착금과 생계비를 모두 빼앗기고 노래방 도우미로 웃음과 노래와 성을 파는 삶을 전전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도상의 간결하지만 유려한 필체와 시적인 묘사는 충심이의 고통을 뒤따라 가며 우리의 슬픔을 자아냅니다. 인신매매범과 조선족, 선교사들, 그리고 남한 사내들에게 이리저리 유린당하는 충심이의 손을 잡고 차마 어쩌지 못하는 정도상의 인간적 고뇌가 여기저기 묻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습니다. 이건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닙니다. 소설 속에 중요한 내용들이 사실과 달라 오히려 충심의 고난에 의문부호를 던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다큐멘터리 보고서일 수 없기 때문에 100% 팩트(fact)로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어느 역사적 사건이나 사람들의 삶을 소설화할 때 그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소설속의 사람들의 삶을, 고통을, 고민을 공감하고 그들의 삶을 호흡하게 됩니다. 어떤 사건을 형상화하여 우리에게 비춰줄 때 소설가는 주인공을 창조할 수 있지만 그 주인공이 공감을 얻으려면 그는 역사적 사실 속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설화하며 소설 속 주인공들이 김일성과 연계된 것으로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혹은 독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암시한다면 그 소설이 온전한 것일까요? 소설가의 자유라고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소설은 광주민주화운동의 격랑 속에 구체적 인간들의 삶과 희망, 고민과 투쟁을 보여주려 했다고 하기보다 그 소설 속 인물들을 활용(!)하여 그 운동을 모욕하거나 왜곡하려는 것이라 의심받게 되지 않을까요?

정도상은 이와 비슷한 잘못을 곳곳에서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1. “그리고 미국, 미국은 왜 우리를 이다지도 못살게 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충심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48P)
2. “한국에서 온 선교사 새끼들, 미국놈들 돈 받고 탈북자 후리는 놈들까지 연길 시내가 완전 개판인데, 봉춘이 그 개새끼까지 끼어드니 기카다간 우리까지 왕청 가게 생겼네. 썩어질“(88P)
3. “ 내 배가 어때서? 김정일 국방위원장만큼은 근사하지 않냐? 그(안마방 손님)의 농담을 듣는 순간 충심은 파르라니 독기가 서렸다. 충심은 자신도 모르게 안마를 중단하고…” (158p)
4 “물론 굶주리다 못해 강을 건넌 사람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떠돌다가 만난 여자들 중 상당수는 충심과 마찬가지로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의 오지 농촌으로 팔려간 사람들이었다”(159P)
5 “한국에서 온 선교사들인가 무슨 북한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사람인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들 시키는대로 서울에 가서 김정일 장군님 욕을 하고 내 고향 욕을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면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161P)
6 “고향으로 돌아가 교양을 받고 본래의 직장으로 재배치 되었는데 마을사람들이 배신자 취급을 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고난의 행군을 함께하지 않고 조국을 배신했다는 따가운 눈초리와 따돌림 때문에 인간의 위신을 지킬 수가 없어 다시 강을 건너오고 말았다” (162p)
7 “이런 개같은 년이! 돈도 없다. 통장도 못 준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응? 내가 여기서 살까? 아주 순 쌩으로 먹자고 드네?”(충심을 한국으로 오게 한 박 선교사가 안산에 사는 충심에게 돈을 달라며 하는 말)

소설의 고비 고비마다 위와 같은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판단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충심과 탈북자의 고통은 미국 때문이며, 대부분의 탈북여성은 배고픔 보다 인신매매범에 의한 것이고, 미국놈 돈받고 탈북자 후리는 놈들이나 ‘숭악한’ 선교사들, 그리고 북한민주화운동가라는 작자들의 꾐에 빠져 한국에 오나 그마저도 엄청난 돈을 뜯겨서 결국 정착금마저 날아가 마침내는 매춘부로 전락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찔레꽃’에서 순박한 함흥처녀 충심이의 파괴자는 미국과 한국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정도상은 충심이의 고통을 내세워 이같은 그의 견해를 독자에게 쉼 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 ‘크로싱’에는 그 어떤 이념적 색채도 보이지 않습니다. 수천만의 고통, 수백만의 죽음, 수십만의 탈북자와 한국에 들어온 동포들의 삶과 비극이 주인공 용수의 눈물과 준이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고통의 원인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정도상, 그의 ‘찔레꽃’은 사실과 다르거나 매우 부분적인 현상을 전체화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소설을 ‘이념서적’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충심이를 이용한 정도상의 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찔레꽃! 정도상을 위하여

정도상의 소설, ‘찔레꽃’은 매우 이율배반적입니다. 한 탈북여성의 고통을 정직하게 응시했음에도 조잡한 이념서적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의 이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국경을 넘어 중국을 유랑하는 사람들을 ‘탈북자’로 만들어 한국으로 ‘기획입국’시키며 영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북한인권’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서 절망했고, 그 때문에 이 작업이 긴급하다고 느꼈다. … 정치적 목적에 희생되는 그들을 볼 때마다 가여움이 목젖까지 치밀어 올랐다.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생각한다면 ‘가짜 인권놀음’을 멈춰야만 한다. … 탈북자 혹은 북한인권은 그들 스스로의 실존적 상황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요청과 의도’에 의해서 구성되고 존재하는 것으로 기획된 측면이 없지 않다. …서방의 미디어와 정치집단(시민단체의 겉모양으로 존재하는 척하는)의 반인권적이며 반평화적인 행위야말로 삶의 온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정도상, 작가의 말)

그는 소설 속 주인공 충심이가 대변하는 북한 동포들과 탈북자들의 고통스런 삶에 절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절망한 것은 북한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의 소설쓰기는 충심이의 고통을 통해 북한 동포들과 탈북자들의 신산스러운 삶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북한인권운동가들을 모욕하기 위해 시작된 것입니다.

수천만 명의 비참한 생활과 수백만의 죽음이 김정일 수령독재는 고사하고 그들의 실존적 상황 때문도 아니라 누군가(미국, 또는 북한인권운동가)의 기획 때문이며, 수십만 명의 내던져짐이 누군가의 요구와 요청에 의한 까닭이라고 여기는 정도상의 의식을 도대체 뭐라 할 수 있을까요? 80년 광주의 비극이 김일성 때문이라고 우겼던 허황한 주장보다 더 어안이 벙벙한 정도상의 저 말에 억이 막혀 숨쉬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나는 ‘찔레꽃’의 주인공 충심이의 고난에 비통해야 했고, 그녀를 이용해서 김정일을 변호하고 북한인권운동가들을 모욕하며 이 모든 것이 미국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비극인 양 독자에게 강요하는 그의 섬뜩한 이데올로기에 진저리쳐야 했습니다.

결국 정도상에게 인간은 없었던 것일까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인권을 주장했던 것도 이념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광주의 인권과 80년대의 인권유린의 책임이 북한 김일성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북한 동포들의 인권유린의 책임이 한국과 미국 등에 있는 것이 아닌데, 더더욱 북한인권운동가들에게 있을 리 없는데, 왜 그는 이 단순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념의 안경을 통과하는 인간들의 인권만이 관심의 대상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불순한 기획과 요청에 의한 것이란 말일까요? 이념이란 인간들을 위한 것인데, 정도상은 이념을 위해 인간을 버린 것일까요? 결국 가련한 사람을 활용하기까지 하는 것일까요?

불현듯 미당 서정주가 생각납니다. 친일파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요. 정도상의 말처럼 그의 실존을 생각해 봅니다. 노비의 자식으로, 가도 가도 서럽기만 했다던 서정주! 남편이 되고 아비가 되었지요. 대를 이어온 노비의 신분을 벗어던짐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고 노비의 설움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자 그리고 내면에서 솟아나는 문학적 욕구를 펴고자 했던 사람. 서정주.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예측하지 못했고 모든 것을 던져 투쟁에 나서지 않았던 것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게 민중이고 민족이었지요. 그 외에 그는 그 시대를 살아간 것이지요. 그 시대를 살아내려면 글을 써야 했겠지요. 잘못이라면 그것인데 그는 친일파라고 지탄받습니다.

다시 정도상을 생각합니다.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남아서 정도상을 증언할 것인데, 왜 굳이 김정일식 화법으로 동포들의 눈물과 운동가들의 열정을 오도하는 소설을 풀어냈는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서정주처럼 어떤 위해나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통탄스러울 일입니다.

그래도 그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념과 인간애가 착종(錯綜)된 그의 소설, ‘찔레꽃’에서 나는 동포들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과 따뜻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80년대에 저항의 무기로 움켜쥐었던 낡은 이념의 안경을 벗고 인간 자체를 들여다 본다면 그는 값진 소설로 ‘찔레꽃’을 넘어설 것이라 믿습니다.

‘찔레꽃’에 한없이 아파했음에도 정도상이라는 소설가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드는 이유입니다. 예술인이 인간을 먼저 아파하고 형상화하여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지, 누가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