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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들의 '망향가'…"불효자는 웁니다"

상봉자 "추석되니 그리움 사무쳐…성묘 가는 것이 마지막 소원"



▲함경북도 풍산군 출신인 김대종(79)씨가 지난해 동생을 만나던 당시 사진을 보고 있다. /김봉섭 기자

"6·25전쟁 때 헤어진 어머니는 매일 밥상에 저의 숟가락을 놓고 있었어요. 밤에는 저의 이부자리를 펴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 아들 얼굴 한번 못보시고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2010년 11월 남북 이산가족상봉 당시 60년 동안 헤어져 있던 여동생을 만난 김대종(79)씨가 동생으로부터 전해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다. 김 씨는 6·25전쟁 때 고향인 함경북도 풍산군에서 몸을 피해 홀로 남하했고, 그 길로 가족과 헤어져 60년간 그리움의 세월을 보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오래 전 일이지만 동생이 전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김 씨의 눈에서는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자식 생각에 수많은 날 잠 못 이뤘을 어머니를 생각할수록 가슴이 메여왔다. 어머니 묘소에 찾아가 동생과 함께 절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한다.



▲어머니 묘소에 찾아가 동생과 함께 절하는 것이 김 씨의 마지막 소원이다. /김봉섭 기자
김 씨는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긴 세월 헤어져 있었지만 동생을 만나는 순간 혈육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 아들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동생에게 들었습니다"고 말했다. 이산(離散)의 아픔을 안은 채 돌아가신 어머님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것은 김 씨에게도 잊지 못할 한이다.
 
지난해 우여곡절 끝에 동생을 만났지만 추석이 다가오면서 김 씨는 착잡하기만 하다. 60년만에 만난 동생과 함께 명절을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명절에 고향의 부모님에게 성묘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김 씨에겐 가장 큰 아픔이다. 

김 씨는 "명절이 되면 가족들이 함께 성묘를 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추석이 다가오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칩니다. 죽기 전에 동생과 함께 어머니 산소에 찾아가 절을 올리고 싶습니다. 산소 앞에서 어머니! 아버지! 불효자 대종이가 왔다고 말하고 싶은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씨는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김봉섭 기자

김 씨는 유일한 혈육인 동생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동생과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동생과 재회한 지 1년여가 지났지만 아직도 그 날의 기쁨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그는 말한다. "지난해 동생을 만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은 후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 줄 선물을 3일 동안 준비하고 동생은 어떤 모습일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을까, 말이 60년이지 정말 그 긴 세월 가족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요."

"상봉 아침에 일어나니 날이 쾌청했어요. 야! 60년 만에 만나니 하늘도 알아주는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고향과 헤어진 곳이 어디냐를 확인하면서 동생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지만 동생과 저는 울지 말자고 했어요. 60년 만에 만났는데 울 시간이 어딨냐면서 말입니다. 한시간 상봉 시간이 왜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한 시간이 10분처럼 빨리 가더군요."

"그저 몸 건강히 아무 탈 없이 잘 지냈으면 합니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고재형(87) 씨. /김봉섭 기자

지난해 11월 60년 만에 여동생과 상봉한 고재형(87)씨도 이북(以北)의 동생 생각에 이번 추석이 반갑지만은 않다. 고향인 황해도 연백에서 면서기를 지냈던 고 씨는 결혼해 딸을 두고 있었다. 1950년 6월 27일 출장길에 전쟁이 발발해 피난하게 되면서 가족들과 헤어지게 됐다고 한다.

동생을 만난 고 씨는 전쟁 직후 전염병이 돌아 부모님과 아내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죽기 전에 부모님과 아내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현재 북한에는 고 씨의 딸과 여동생만 남아 있다. 지난해 여동생을 만나 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고 씨는 "이북에 딸아이와 여동생이 남아 있습니다. 딸아이는 현재 간질병을 앓고 있다고 하는데, 남한에선 간질병을 치료 할 수 있다고 하나 북한에선 의료 시설이 취약하고 의약품이 부족해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딸아이를 남한으로 데리고 와 하루라도 빨리 치료받도록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가슴이 아픕니다"고 안타까워했다.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돼 이북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지금 당장은 동생과 딸이 그저 아무 탈 없이 살기를 바랄 뿐이다. 고 씨는 "지난 60년 동안 이북의 가족들과 함께 살날을 손꼽아 기다려왔지만 솔직히 통일이 언제 될지 모르겠어요. 이젠 몸도 마음도 지쳐 그저 동생과 딸이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고 말했다. 



▲60년 만에 만난 고재형 씨의 동생 가족들 사진. /김봉섭 기자
그는 "동생은 '살아 있는 동안 오빠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개인이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죠. 세월이 좋아져서 디시 만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저 서로 건강히 잘 살다가 죽는 수밖에 없죠"라고 말했다.

"동생도 허리가 많이 아파 이산가족 상봉 때 자식들이 부축하고 왔습니다. 이북에서 충분히 먹지도 못하고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거 같아요. 참 가슴이 아프더군요. 통일도 좋지만 동생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죽기 전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한번 만났으면 합니다."

김 씨와 고 씨는 60년 만에 만난 동생이 한없이 반가웠지만 시종일관 '장군님의 은덕'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그들을 보며 이념의 장벽을 느꼈다고 한다.

고 씨는 "이산가족 상봉 때 북측 감시요원이 있었어요. 동생과 조카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았아요. 동생은 여러 차례 장군님 덕택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말을 연발하더군요. 참 뭐라고 할 수 없이 그냥 듣고만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김 씨도 "'오빠 나는 장군님 은혜로 잘 살아간다'는 동생의 말에 솔직히 이념의 장벽을 느꼈습니다. 호텔 방에서 개별 상봉을 하는데 동생과 조카는 이북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제대로 못하더군요. 아무도 없는데 꼭 누가 감시하는 것처럼 말조심을 하는데. 참 북한이라는 사회가…"라며 말끝을 흐렸다.



▲추석을 앞두고 고재형 씨가 동생 가족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김봉섭 기자
이북5도청에 의하면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이산가족은 천만명이다. 통계청이 지난 2005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 수만 해도 71만명을 헤아린다. 6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현재는 상당수의 이산가족들이 사망하거나 상봉을 포기해 현재 북한의 가족들과 상봉하기를 원하는 이산가족들은 8만여명이다.

이산가족들은 상봉 행사가 남북관계 등 정치적인 문제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남북관계와 상관없이 판문점 등에 면회소를 설치해 수시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고 씨는 "남북간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이산가족들의 아픔은 더욱 깊어집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인도적 차원에서 수시로 상봉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며 다시 한 번 먼 하늘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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