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형묵, 그는 강하고 원칙적인 인물”

▲ 연형묵 전 자강도당 책임비서

탈북자 김영성(72)씨는 연형묵과 체코 프라하공대 동기생이다. 연형묵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체코에서 유학했다는 남한 발간 ‘북한인명사전’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씨에 의하면 연형묵은 김일성 호위병 출신으로, “호위병 가운데 쓸만한 인물을 골라 동구라파에 유학보내라”는 지시에 의해 당시 학생들을 인솔하고 체코슬로바키아로 날아온 인물이었다.

당시 김일성, 김두봉, 최창익의 호위병 20명 정도가 유학생들 틈에 끼어 있었는데, 연형묵은 일반 학생들보다 나이가 5~6살 정도 많은 데다 군관 출신이어서 감히 말도 붙이기 어려웠다고 한다.

※ 김영성씨의 요청으로 인터뷰 사진은 싣지 않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 편집자 주

“김일성과 신발도 바꿔 신어봤다” 자랑하던 연형묵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한 이력에서 알 수 있듯 연형묵은 ‘혁명 유자녀’다. 그의 부모는 김일성 빨치산 부대 소속으로 활동하다 연형묵이 9살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간도에서 고아처럼 떠돌던 연형묵을 김일성이 해방 후 불러들여 아들처럼 키웠다고 한다.

이런 이력 때문에 연형묵은 김일성을 ‘목숨을 걸고’ 따른 데다 체격까지 좋은 탓에 만경대혁명학원을 마친 후 곧장 김일성 호위병으로 차출됐다. 연형묵은 김일성과 체격이 비슷하고 키가 같으며 신발 사이즈도 똑같아 “김일성과 신발을 바꿔 신어봤다”고 자랑하면서 마치 친아버지처럼 이야기했다고 김씨는 회고한다.

한국전쟁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북한의 재건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무상으로 유학생을 대거 받아들여 교육시켰는데, 북한 수뇌부의 호위병 출신들은 가장 생활이 윤택했던 체코슬로바키아로 보내졌다고 한다. 연형묵이 학생들을 인솔하여 체코로 간 것은 1952년.

“당시 연형묵은 유학생 강습소 학생위원장이었습니다. 강성산은 체코 주재 당위원장 이었죠. 공식적인 당조직으로 공개되었던 것은 아니고 동향회(同鄕會)라는 이름으로 노동당 조직을 꾸렸는데 그 책임자가 강성산이었어요.”

당성이 강한 사람, 김일성 비판하는 유학생 색출해내기도

동갑인데다 유학 동기인 연형묵과 강성산은 훗날 둘 다 정무원 총리가 된다. 강성산이 1984~86년 총리를 맡고, 연형묵이 1988~192년 그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연형묵이 해임된 후 강성산이 1992~98년 다시 총리직을 수행했다. 김영성씨는 연형묵과 강성산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연형묵은 당성(黨性)이 강하고 원칙적인 사람이었어요. 인간적인 따뜻함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죠. 반면 강성산은 남한에서 태어났다면 목사쯤 할만큼 성품이 유순한 사람입니다. 연형묵은 조직력과 리더십이 있었고 부정과 타협할 줄 몰랐죠.”

1952년 체코에 도착한 유학생들은 이듬해까지 1년간 어학공부를 한 후, 다시 1년간 예비과에 보내졌다. 1955년 본격적으로 학부수업을 들어가 11학기를 마친 후 1959년 본국으로 돌아왔다. 연형묵은 기계학부 학생이었는데 두뇌가 명석하여 유학생들 가운데 가장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유학시절 연형묵은 김일성에게 절대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 출세의 기반을 굳게 다진다. 그 발단은 195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반(反)소련 운동.

스탈린이 죽고 난 후 1인 독재와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랐고, 북한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김일성 우상화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본국(북한)에서는 문제있는 학생들을 귀환시키라는 비밀 지시가 내려왔고 학생위원장과 당책임자였던 연형묵과 강상산이 주축이 된 충성심 높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이 그러한 학생들을 ‘골라내는’ 역할을 맡았다.

“방학 때 ‘조국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겼어요. 방학을 이용해 조국에 들어와 쉬었다 가라는 거죠. 오랜 유학생활에 지쳐있던 학생들은 좋다고 박수를 쳤는데, 조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체코 유학생 1천명 가운데 300~400명이 그렇게 해서 유학생활을 중도하차 했죠.”

김일성이 “제대로 된 간부”라고 칭찬

유학생활을 끝까지 마친 학생들은 지금 북학의 주요 요직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김일성고급당학교 교장이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자격심사 위원인 김시학, 중앙재판소장인 김병률 등이 체코프라하공대 출신이다.

김두봉과 최창익의 호위병 출신으로 유학했던 학생들은 훗날 전혀 간부로 등용되지 못했고, 행방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귀국 후 연형묵은 대포를 주로 생산하는 군수공장인 65호 공장의 기사장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중앙당으로 올라가 중공업 부부장, 부장, 당중앙위 비서 등 주로 군수산업 분야를 담당하면서 출세가도를 밟게 된다.

김영성씨가 전하는 연형묵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는 일화 하나.

“연형묵이 65호 공장 기사장으로 있을 때 그곳 공장장이 성분이 좋지 않았나 봐요. 그런데 생산하는 포탄 가운데 불량품이 많다는 보고가 올라갔고, 무언가 트집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공장장이 의도적으로 불량품을 만들고 있다고 모함하는 의견을 올렸겠죠.”

“김일성이 직접 현지조사를 내려왔습니다. 그때 연형묵이 실태 보고를 했는데 불량품을 만든 것은 잘못이지만 의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고 공장장을 옹호했나 봅니다. 자기가 공장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죠. 김일성이 이 모습을 보고 ‘연형묵은 사람은 함부로 깎아 내리지 않고 아첨하지 않는 제대로 된 간부’라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김정일에게 직언할 유일한 사람

이런 일화 외에도 연형묵은 우직(愚直)할 정도로 원칙적이고 자기 몸을 사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한때 김정일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오른팔’로 불리고 있으며, “북한 내에서 김정일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연형묵 뿐”이라는 평가까지 있다.

그런 연형묵이 자강도당 비서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 김영성씨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좌천이나 와병, 사망이라면 김정일은 중요한 인재를 하나 잃은 것”이라고 말했다.

연형묵은 체코 유학시절 사귄 여학생과 훗날 결혼했다. 평양경공업대 당비서를 지낸 신오순으로 회령 출신이다. 체코 프라하공대에서는 식료공학을 전공했다. 김영성씨는 “신오순은 노래를 참 잘했다”고 회고하며 “연형묵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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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