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폐유통, 北 ‘외교관’ 여권 특별조심

▲ ‘슈퍼K’를 유통하다 체포된 다나카 요시미

1970년 3월 31일. 일본 도쿄를 떠나 후쿠오카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소속 요도호가 납치된다. 납치범들은 ‘세계동시혁명’을 꿈꾸던 10~20대의 일본 청년들. 이들은 스스로를 적군파(赤軍派)라 했다.

이들이 목적지로 선택한 곳은 북한. 원래 쿠바에 가려 했으나 국내선 항공기를 납치해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로 번뜩 북한이 떠올랐다고 한다. 북한은 그동안 이 ‘테러리스트’들을 ‘정치적 망명자’들이라며 보호해주고 있다.

요도호 납치범 9명은 북한당국이 제공한 평양 인근의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제외하고는 그동안 특별한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1988년, 일본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납치범 한 명이 체포됐다. 그는 이미 3년 전에 밀입국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1996년, 또 한 명의 요도호 납치범이 체포되었다. 이름은 다나카 요시미(田中義三). 요도호 납치 당시 21살 청년이었던 그는 이미 47살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그가 잡힌 곳은 북한도 일본도 아닌 캄보디아-베트남 국경. ‘김일수’라는 북한 외교관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고, 가방에는 정교하게 위조된 ‘슈퍼노트(Super Note)’ 수만 달러가 들어있었다.

25년 전의 비행기 납치범이 이제는 위조달러를 유통한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그가 소지한 ‘슈퍼노트’의 일련번호가 K로 시작해 이것을 ‘슈퍼K’라고 부르는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는 이미 수년간 동남아를 무대로 활동하는 것이 포착돼 미국 재무성 산하의 위조화폐 전문 조사국인 SECRET SERVICE(SS)의 추적을 받아왔다고 한다.

태국으로 압송된 다나카 요시미는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위조달러를 모른다고 잡아떼 3년간의 재판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2000년 일본으로 송환돼 항공기 납치 범죄에 대해서만 1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96년 위조달러 집중 적발

북한이 위조달러를 제조하고 있다고 강력한 의심을 받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나카의 경우처럼 외교관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위조달러를 소지하고 있다 체포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96년은 북한의 위폐 유통이 여러 차례 적발된 해이다. 3월에 다나카 요시미가 체포되었고, 같은 달 러시아 모스크바 주재 북한 공관원이 위폐 80만 달러를 환전하려다 적발돼 추방되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는 북한 대사관 직원이 위폐 300만 달러를 갖고 있다 베트남 당국에 압수됐는데, 북한은 이것을 끝까지 ‘국유재산’이라고 주장해 결국 베트남 정부가 북한에 돌려주기도 했다.

그 해 12월에는 몽골 울란바토르 주재 북한 영사관의 3등 서기관이 10만 달러를 환전하다 적발돼 추방됐다. 그가 환전한 위폐 중 7만 5천 달러는 회수했으나 나머지는 유통되었다고 한다. 다시 같은 달에는 루마니아 주재 북한 무역참사가 위폐 5만 달러를 환전하다 적발돼 추방됐다.

1996년에 이렇게 집중적으로 적발이 된 것은 ▲1994년 슈퍼K가 처음 발견된 이후 식별법이 널리 알려졌고 ▲미 정보당국의 추적이 계속되면서 국제공조가 이루어졌으며 ▲ 1996년 미국이 68년만에 100달러 지폐를 새로 교체하면서 북한이 구권(舊券) 위조화폐를 빨리 유통시켜야 한다는 촉박함이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1998년 4월에는 김정일의 비자금 담당서기인 길재경(2000년 사망)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위폐 3만불을 환전하다가 적발되었다. 당시 길재경은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무역참사부의 ‘리문무’라는 이름의 여권을 소지하고 자신을 끝까지 ‘리문무’라고 우겼으며, 나중에 그가 김정일의 금고지기인 길재경으로 드러나자 국제적으로 큰 파장이 있었다.

미국과 러시아의 위폐 조사기관은 길재경이 여러 차례 위폐를 환전한 정황을 포착, 몇 개월 동안 그를 추적 중에 있었다고 한다. 길재경은 스웨덴 대사로 재직하던 1976년에는 마약을 밀매하다 적발돼 추방된 바 있다.

이렇듯 북한인이 위폐를 소지하고 있다 적발되면 거의 모두 ‘외교관’이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상당한 외교적 마찰이 있을 터이지만, 국제범죄로는 워낙 널리 알려진 북한이다 보니 상대국에서도 이젠 그러려니 할 정도이다.

1995년 8월에는 일본의 한 기업인이 북한과 무역을 하고 대금 1만 달러를 받았는데 모두 위폐였다. 북한의 무역회사는 ‘몰랐다’고 답변했지만 100달러짜리 100장 가운데 한 두 장이 섞인 것도 아니고 통째로 위폐였다는 것은 위폐조직과 직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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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