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중국 사진작가의 대담한 밀착방북기②

▲ 북한방문기가 게재된 中사이트

대략 11시 반 정도, 기차는 염주라는 역전에서 멎었다. 기차는 영문도 없이 역에서 두 시간 동안 정차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지금은 고압정전시간’이라고 한다.

전용열차임에도 열차에는 복무원이 없었다. 물을 주는 사람도 없었고, 청소하는 사람도 없었다. 언제 기차가 떠나는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방송도 없다. 다만 한가지 명백한 것은 내려서는 안되고, 사진을 찍어도 안된다는 것이다. 승무원과 비슷한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며 열차 칸을 순시했다.

▲평안북도 염주군 역전, 사람은 그림자도 안보인다

염주역 건물의 정면 중간에 한 폭의 김일성초상이 걸려있었고, 양면에 구호가 있었다. 오른쪽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만세”, 왼쪽에는 “위대한 조선노동당 만세”라고 씌어져 있었다. 북한의 역전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이와 같은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 멀리 보이는 것이 염주군 소재지

역구내는 아주 조용했다.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선 듯 했다. 멀리 역전 쪽에 군복 입은 몇 명의 군인들만 보일 뿐이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자리를 잡아 좀 자라고 했다. 가이드는 하도 많이 다녀보아 이렇게 멈춰서면 기차가 세월없이 정차한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 역구내에 멎어 있는 화차

역전에는 화물차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화차가 아주 낡아 우리나라 같으면 파철이 되었을 것들이다.

처음 만난 북한 어린이

한참 보고나니 더 볼게 없었다. 이때 움직이지 않는 화차아래에 13~14살 가량 되 보이는 아이가 까맣고 큰 눈을 굴리면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가 도대체 뭘 찾는 걸까?

속으로 ‘우리에게 먹을걸 달래려고 하나? 그렇다면 오라.’ 우리는 그에게 줄 먹을 것을 준비하고 손짓했다. 그러나 그 애는 나올 엄두를 못 냈다. 나는 머리를 내밀어 열차 앞뒤를 바라보았다.

과연 열차의 앞뒤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과 안전원(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열차와 화차 사이에 있는 풀랫폼이 봉쇄선처럼 갈라놓고 있었다. 그 애는 감히 넘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왜 플랫폼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지를 알게 되었다. 국제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이면 역구내 안전원들과 역무원들이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가만가만 사진기를 꺼내 차창밖에 내밀고 여러 번 찍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애는 찍지 못했다.

오후 두 시가 거의 돼서야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꾸 섰다, 천천히 가다가는 서고, 섰다가는 가고, 심리는 아주 불쾌하고 짜증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가는 길에 본 몇 개의 사진이다. 차가 움직이고 마음이 불안해 종합해 본 것이다. 신의주에서 평양까지 가는 도중 우리가 탄 열차와 어귄 기차가 10개나 될까, 북한에는 운행되는 열차가 거의 없었다.

▲ 건설장에 세워진 구호판, 북한에 건설장마다 이런 피켓이 항상 등장한다

달리던 기차가 갑자기 천천히 달렸다. 알고 보니 철길 노반의 침목을 교체한다고 한다. 기차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 같아 나는 두 손으로 트렁크 선반을 꽉 잡았다. 수리구간이 몹시 길었다. 길 옆에는 붉은기가 나붓기고, 구호판과 속보판들이 세워져 있었다.

▲ 철길대 노동자들이 열차가 지나가자 뒤로 돌아서 있다.

보아하니 작은 공사 같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좀 지났는데, 공사노동자들이 그때에야 밥을 먹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마 한 개 작업반의 식사인 것 같다. 제일 위쪽은 아마 영도(반장)의 자리인 것 같았다.

▲카메라에 잡힌 여병사의 모습

기차가 통과하는 터널, 다리마다 인민군 군인들의 초소를 볼 수 있었다. 모두 여 병사들이다. 그 초소들은 아주 웃기게 생겼는데 만약 탐조등만 없다면 옛날 우리나라 ‘旱厕(한처)'(중국의 지붕 없는 재래식 변소- 편집자 주)처럼 보였다. 한 여 병사의 반신만 보이고 등뒤에 멘 총을 볼 수 있다.

▲ 벼 베기를 하는 농민들

풀리지 않는 의문, 넓은 땅에 왜 굶어 죽기까지 하나?

북한에 언덕은 확실히 아주 많다. 그러나 대평원과 같은 것은 아주 적다. 그리고 우리동북의 대평원보다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고 기후도 비슷했다. 우리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이런 좋은 자연적 조건과 비옥한 대평야를 가졌는데 왜 주민들이 배고픔을 당하는가 하는 거다.

아무리 자연재해를 만났다고 해도 놀랍게도 굶어 죽는 사람 있다니? 북한은 겨우 이천만 인구가 아닌가, 요녕성 한 개 성(省) 인구의 절반보다 더 적은데! 만약 중국의 이천만 인구가 이런 평원에 살고 있다면 먹고 살 걱정을 안 하겠는데……

▲ 농촌마을에 배추가 자란다. 중국의 배추와는 대비가 안된다

가이드가 소개하기를 북한의 농업은 아직도 집단경제라고 한다. 옛날 우리나라의 생산대(모택동시기 협동조합)와 같이 집단적으로 모여 농사한다고 한다. 주요 농작물은 벼, 품종이 오래되고, 농업기술이 따라서지 못해 생산량이 아주 적다는 거다.

▲ 살림집 보수를 하는 것 같다. 목재치고 너무 가늘다

북한영화에서 나오는 농업기계화는 말할 처지도 못 된다. 내가 오는 도중에 본 트랙터는 벼단을 나루던 두 대밖에 보지 못했다. 협동농장에서 벼를 수확하는 모습이다. 중간에 작은 점은 창문유리의 손잡이고, 몰래 찍어서 멋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날이 점점 어둡기 시작했다. 더는 찍을 수 없었다. 북한의 야경은 정말 지옥 같았다. 밝은 곳이 한곳도 없었다. 한 점의 소리도 없었다. 우리는 마치 한편의 암흑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기차는 왜 안보이나, 얼마 더 가야 평양에 도착할 수 있는지,,,,

일정에 따르면 응당 오후 4시 30분에 평양에 도착해야 하는데, 지금 5시 반이 넘었다. 평양에 도착하려면 아직 두 시간은 더 가야 한다고 한다. 말이 국제열차이지 정전이 되어 무려 두 시간이상 연착된 것이다.

▲ 황혼이 깃들기 시작한 농촌 아이들이 보인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밝은 곳이 나타나면 그곳이 평양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밝은 곳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잠들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7시가 되어왔다. 기차는 아직도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 사진은 날이 어둡기 전에 찍은 것이다.

▲ 세명의 북한 안내원들, 한 사람은 성이 김씨, 한 사람은 최씨, 다른 사람은 생각이 안 난다.

열사람인데 가이드는 3명, 비효율적이다

평양에 도착했다. 북한측에서 가이드가 3명이나 왔다. 우리측 가이드는 김 가이드와 최 가이드, 그리고 우리가 관광 다닐 때 촬영해줄 촬영기사를 차례로 소개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조바심이 났다. 김씨는 가이드가 맞을 것이고, 그럼 두 사람은 뭘 하는 사람들이야? 특무라면 두 사람씩이나 파견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 대표단은 겨우 열 사람인데……

김 가이드는 요즘 평양에 관광객이 밀려 호텔이 없으니, 묘향산호텔로 가자고 했다. 묘향산까지는 약 180리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평양의 가루등은 불이 켜진 것보다 안 켜진 것이 더 많았다. ‘전기를 절약하는가’ 고 묻자 김 가이드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우리측 가이드가 노래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옹헤야, 방안에 불이 있고
밖에는 까맣네, 옹헤야, 옹헤야!
방안에 불이 있고 밖은 까맣네
밖에 불이 있고 집은 까맣네
가로등을 안 켜니 모두 까맣네”

노래가 멎자, 차 안에는 폭소가 터지고 성이 난 김가이드는 웃지도 화내지도 못했다.

평양에서 묘향산까지 고속도로가 되어있어 느낌에 괜찮았다. 그러나 평양을 나올 때 적어도 경찰들이 다섯 번 검열했다. 차 번호를 보고 여행객들이라고 하면 통과시켰다.

후에 가이드가 말하기를 북한 주민들은 마음대로 여행도 못 다니게 한다고 한다.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갈 때는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더욱이 평양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고 한다. 지방사람이 평양을 보려면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것만큼 힘이 든다고 한다. 묘향산에 큰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뭐라고 했는지 난 잊어버렸다.

▲ 묘향산에 있는 서산호텔, 사진은 아침에 깨어나 찍은것이어서 안개에 잠겼다

▲ 묘향산 호텔의 내부전경

어쨌든 북한에서 3번째로 좋은 호텔이라고 한다. 평양의 고려호텔, 양각도 호텔, 그 다음이 묘향산 호텔이라고 한다. 호텔은 겉은 아주 위엄 있어 보인다.

▲ 호텔에 비치된 TV

방안에 전등은 하나만 켜져 있어 늦게 사람을 불러 수리하게 했다. 위생실은 통합되어 있었는데, 보기에 산뜻했다. 그러나 고급호텔이라고 보기에는 좀 뒤떨어진 편이다.

▲ 호텔방 내부 모습

후에 발견했지만, 방에 바퀴가 있었다. 그때부터 호텔의 위생상황에 눈을 밝혔는데, 베개수건과 침대시트에는 지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고, 청결치 못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TV를 보려고 하는데 아주 낡고 채널이 한 개밖에 나오지 않았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내용을 보면 수령께 충성하자고 추동 하는 것들이었다. 그마저 10시가 지나자 신호가 끊어졌다.

▲ 5명이 한 식탁에서 먹기에는 양이 부족했다

식당의 반찬이 아주 적었다. 점심에는 도시락만 먹어서 그런지 저녁밥을 먹을 때 또 한차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반찬의 양이 아주 작아 중국에 비교할 수가 없다. 한 수저 집으면 몽땅 집힐까봐 젓가락을 댈 수가 없었다. 우리 단체 10명이 두 개의 식탁에 나뉘어 앉았다. 규정에는 한 책상에 8명이 앉게 되었는데, 8명 먹을 양을 5명이 먹어 그런지 괜찮게 느껴졌다.

▲ 호텔 복무원과 함께

옆에 있는 작은 여자애는 김치를 가져온 식당의 복무원이다. 착하게 보였고, 항상 미소를 지었다. 김치가 모자라 더 요구해 가져왔는데, 값은 따로 받았다. 애를 봐서는 돈을 주고 싶은데, 김치 값을 더 받는 데 좀 불쾌했다. 그렇다고 애를 탓할 수 없지, 김치값을 따로 받는 것은 호텔의 규정이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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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정리 : 한영진 기자 (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