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외교관, 김정은 체제 비전 없다고 판단해 한국행 결심”



▲ 아내·자녀와 함께 한국으로 망명한 영국 주재 북한 외교관 태영호. 사진은 태영호가 2014년 영국에서 강연하는 모습. /사진=연합

제3국 망명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던 태영호(55·가명 태용호)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가족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최근들어 귀순한 북한 외교관 중 최고위급이란 점에서 태영호의 한국행 선택은 현재 김정은 체제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태영호는 덴마크와 스웨덴, 영국 등 외교 무대를 20여 년간 누비면서 북한의 외교통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또한 그동안 외교적 고립 상황에서도 핵과 미사일의 당위성을 강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부에선 체제 선전에 주력해왔지만 내적으로는 체제에 염증을 느꼈던 셈이다.  

북한이 충성분자로 평가하는 외교관들에게 ‘우호세력 확장’이라는 특명을 내렸지만 정작 담당자들은 겉으로만 ‘충성’, 속으로는 ‘딴맘’을 품고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정은이 주장하는 ‘사상 강국’도 ‘모래로 쌓은 성’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불과하다는 관측이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번 고위 외교관의 귀순은 북한 사회에 상당히 큰 파장을 불러 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사건은 김정은에 염증을 느낀 북한 엘리트층의 변화를 상징한다는 지적이다. 

또한 영국 정부의 대북 제재 관련 입장도 태영호를 압박했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영국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과 미국, 일본 등과 함께 강도 높은 대북 제재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특히 영국 정부가 북한인권 문제를 북한에 대한 정책적 접근의 우선순위로 두는 가운데 런던에서 북한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행사를 잇달아 개최한 점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의 부담을 가중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 당국의 제재·인권압박 국면 돌파 지시가 오히려 상당한 압박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상황을 직접 지켜보면서 북한 체제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탈북을 결심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은 17일 데일리NK에 “그간 북한 외교관들은 김정은 정권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전 세계가 북한을 압박하고 있으니 자신들의 능력도 한계에 달았다고 느꼈을 것”이라면서 “귀국해서 북한의 고립을 막지 못했다는 문책을 받을 것을 우려한 끝에 체제에 염증까지 느껴 망명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전 원장은 또 “외교관들도 자신들의 일을 충실히 하려면 어느 정도 국가가 뒷받침을 해줘야 하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고 고립 상태로 빠져들고 있으니 자괴감이 컸을 것”이라면서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종합적으로만 보면 그런 심리적 압박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진욱 통일연구원장도 “유엔의 대북제재는 물론 (미국이) 북한 지도부를 제재 리스트에 올리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절감,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된 것”이라면서 “북한 사회가 더 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을 여실히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최 원장은 이어 “대북 제재 국면임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나와 계속 충성자금을 바쳐야 한다는 부담감과 성과 없이 귀국했을 때 숙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태영호의 귀순 이유로 볼 수 있다”면서 “북한 내부에서도 5년째 공포정치가 이어지고 있어, 이대로는 아무 비전이 없다고 판단해 망명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탈북 러시가 이어지다보면 결국 북한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면서 “최근 북한의 무역량을 수치상 분석하면서 대북 제재의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던데, 이번 사건만 보더라도 북한이 제재로 인해 느끼는 압박은 엄청나다”고 부연했다. 

다만 이번 사건이 북한 엘리트 전반에 걸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라고 예단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오히려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김정은과 간부·주민들을 분리하는 전략과 함께 체제 붕괴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현준 원장은 “이전에도 외부 세계를 목격한 외교관들이 체제에 염증을 느껴 망명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면서 “때문에 이게 외교관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인지, 아니면 북한 내부의 간부들에게까지 파장이 미칠 만한 일인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북 전문가는 “체제 선전과 홍보를 수년간 담당해오던 인사가 체제에 염증을 느꼈다는 건 김정은 우상화 전략이 삐걱대고 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면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간부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드는 전략과 함께 북한 당국을 아프게 하는 방법을 내밀하게 짜야 될 때”라고 말했다.



▲ 지난해 5월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왼쪽)이 에릭 클랩튼의 런던 공연장을 찾았을 때 옆에서 수행하던 태영호./사진=일본 TBS 방송 캡처

▶태영호는 누구?

태영호는 북한 외무성 내에서도 서유럽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로 꼽힌다는 증언이 나온다. 김정일의 덴마크어 전담통역 후보인 ‘1호 양성 통역’으로 뽑혀 덴마크에서 유학을 한 것으로 알려진 태영호는 이후 1993년부터 덴마크 대사관 서기관직을 맡기도 했다.

1990년대 말 덴마크 주재 대사관이 철수하자, 그는 잠시 스웨덴으로 자리를 옮겨 외교통 역할을 수행하고 이후 귀국해 EU 담당 과장으로 승진한다.

태영호가 본격적으로 외국 인사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건 200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한-EU(유럽연합) 인권대회 당시 북한 대표단장을 역임하면서부터다. 2000년 12월 영국과 북한이 수교를 맺고 2003년 4월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이 정식 개설되면서, 1등 서기관 신분으로 런던에 파견된다. 이후 10여 년간 승승장구해 망명 직전엔 현학봉 영국 주재 북한 대사의 뒤를 이은 2인자 자리에 올랐다는 게 외교 소식통들의 설명이다. 영사업무와 함께 북핵·인권 문제 등에 대한 김정은 체제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온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태영호의 성분 자체가 최고위급이었다는 증언도 나온다. 고등중학교 재학 시 중국서 유학하며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으며, 귀국 후엔 평양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하고 외무성 8국에 배치됐다는 게 관련 소식통들의 설명이다.

김정은의 친형인 김정철이 2015년 영국 가수 엘릭 클랩튼의 런던 공연장을 찾았을 때 그를 수행했던 인물도 태영호였다. 통상 북한 외교관을 비롯해 해외 파견직이 3년 주기로 자리를 정리, 귀국하는 게 일반적이란 걸 감안하면, 20여 년간 서유럽의 외교통 역할을 비롯해 김정은의 친형을 수행했다는 건 그만큼 북한 당국의 신임을 두텁게 받은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