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초기 김일성의 전술적 실패와 오류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의 공세를 지속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 김일성은 잦은 전술적 실패와 자신의 오류를 부하에게 전가하면서 처형을 명령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군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사례를 자주 보였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 제3, 4 사단은 서울 시내로 남진하여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제1사단(사단장 최광)의 진군이 문제가 됐다. 전쟁이 시작되자 제1사단은 고랑포를 거쳐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국군 제1사단의 조직적인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진군이 타 사단에 비해 지연됐다. 당시 고랑포→임진강→문산→서울로 진군 경로를 하달한 이는 전쟁계획을 세우고 지침을 내렸던 최고사령관은 김일성이었다. 임진강에 도달한 제1사단장 최광은 예하 연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최광을 체포하여 총살시키라고 명령했다. 당시 김일성은 제1사단의 부진한 진격에 대단히 신경질적이었으며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일체의 반성도 없었다.


김일성의 작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던 사례는 인민군 제2군단의 수원점령 실패에서도 나타났다. 인민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달성됐다. 그러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김일성은 수원점령에 실패한 인민군 제2군단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문책의 칼날을 들이댔다.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다.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소장이던 최현은 제2사단장으로 임명됐다.


김일성의 책임전가성 문책은 전쟁 후에 더 잔인하게 나타났다. 전(前) 북한노동당 비서였던 임은(林隱)에 따르면, 6.25전쟁에서의 무참한 패배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피의 숙청’을 단행케 한 계기가 됐다. 자신이 전략안(戰略眼)이 없음으로 인해 패배한 전쟁의 책임을 군사령관에게 전가하고 개인 독재의 길을 여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의 숙청은 그 잔인함에 있어 스탈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임은 자신이 희생의 직전까지 갔다. 그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장군 중 95%에 해당하는 70여 명이 학살 내지 처형되고 당··군의 간부급 20만 명이 숙청됐다.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합하면 희생자 수는 무려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林隱, ‘北韓 金日成王朝 祕史’ 한국양서, 1982, pp.326-327).    


뿐만 아니었다. 전쟁 초기 서울만 점령하면 한국 내 20만 명의 남로당원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한국 정부를 붕괴시킬 것이라는 김일성의 전망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실책은 서울을 점령하고 나서 제2차 작전을 준비하는 데 3일이라는 긴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차후 작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가져오게 했다는 점이다. 서울을 점령하고 난 이후 인민군의 전투는 모두 작전계획도 없이 진행됐다. 이 점은 최고사령관이었던 김일성에게 명확한 전략사상이 없었다는 증거이며 그가 우연성이나 행운에 운명을 거는 모험주의자의 전형적 표본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의 반격이 거세지고 전세가 역전되자 김일성은 최고사령관으로 자신만이 내릴 수 있었던 후퇴명령도 제때에 내리지 않고 남보다 먼저 도망쳤다.


남조선 해방을 호언장담했던 김일성은 스탈린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을 법하다. 임은이 당시 김일성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유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 한다(林隱,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金日成 王朝’, 沃村文化社, 1989) p252.


반면, 한국군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안타까웠던 전쟁 분위기가 최현에 의해 조성됐다. 전쟁 개시 당시 인민군 38선 경비 제3여단장이던 소장 최현이 옹진반도 침공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우리 국군이 절박한 처지로 내몰리게 됐기 때문이다. 


“6월 25일 전쟁개시와 함께 내무성 경비국 여단들은 인민군 부대로 개편되었다. 최현 여단장은 과거 3여단의 2개 대대와 제1사단 14연대의 병력으로 옹진반도를 해방하라는 전투과업을 받았다. 6월 25일 새벽 4시, 조선전쟁의 첫 신호탄은 바로 이 전선에서 올랐다. 남조선 국방군 17연대는 단 한 번 반격을 시도해보지도 않았으나 비교적 질서있게 후퇴하였다. 26일 16시경에 최현의 눈앞에서 국방군 17연대의 주력부대가 배를 타고 인민군 부대의 포사격을 받으며 전선을 빠져나갔다. 6월 27일, 최현 부대는 해주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조선인민군의 첫 개선부대로 마중을 받고 시내행진을 하였다. 최현 부대 이외에는 해주에 들어온 부대는 없었다. 육로로 남진하게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해주에 들렀던 것이다. 다른 부대들은 계속 남진하였다. 전쟁 초기에 국방군이 38선 이북에 나타난 일은 전혀 없었다. 최현 부대는 이미 해방된 개성과 문산을 거쳐 이렇다 할 전투 없이 29일 서울에 당도하였다.”–林隱,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김일성 왕조’ (沃村文化社, 1989), pp.214-215.


그 같은 전공으로 최현은 제2사단장으로 영전됐다. 그 후에도 최현은 인민군 후퇴시기에 유엔군의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최현의 출세가도는 거침이 없었다. 1956년 4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6월 민족보위성 부상이 되었다. 1958년 4월에는 내각 체신상, 1966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2차 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68년 말에서 1969년 초에 있었던 군 수뇌부 숙청사건을 계기로 민족보위상이 되었고, 1970년 11월에 있었던 노동당 제7차 당대회 때에는 서열 5위의 정치위원으로 올라섰다. 1972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서 그는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대 당 정치위원·군사위원과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인민무력부장(민족보위상의 개칭) 등 김일성 시대 최현은 막강한 직책들을 지녔다.